배우 이선균이 마약 수사를 받다가 죽었다. 인기와 경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삶을 거두는 극단적 방식이었다. 훌륭한 배우였다. 고단한 일상을 견디는 서민의 삶을 담은 드라마 ‘아저씨’, 반지하와 대저택으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빈부의 현실을 그려낸 영화 ‘기생충’의 열연까지,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터라 충격은 더 컸다.
죄 지은자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죄가 확정되기까지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다. 이선균은 마약 음성 판정 뒤에도 사건 본질과 동떨어진 사적 대화까지 보도되며 모욕당했다. 경찰에서 흘러나온 듯한 내용을 언론이 무차별 보도하는 망신주기가 이어졌다. 장사가 되는 일에 뒤처질세라 앞다투어 기사가 쏟아졌다. 범죄 혐의가 입증되지 않은 내용뿐이었다. 산더미 같은 언론 보도는 실로 원색적이었다. 시민 이선균의 인격과 인권은 무참히 난도질당했다. 의심에 불과한 수사 내용이 날것으로 터져 나와 먼저 낙인부터 찍는 마녀사냥과 다름없었다. 반복된 공개 소환과 포토라인 세우기는 한 시민의 혐의가 중대사이기나 한 듯 사회적 관음증의 광풍을 일으켰다.
누가 이선균을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경찰과 언론이 공모한 ‘사회적 타살’에 가깝다. 망신과 모욕주기를 동반하는 반복된 낙인을 통한 악마화가 결국 죽음을 불렀다. 수사기관이 흘리고 언론이 받아쓰는 오랜 관행을 끊지 못했다. 설왕설래 말은 많아도 근본적인 비판이나 자성은 없었다. 결국 동료 배우들이 나섰다. 봉준호 감독을 필두로 문화예술인들이 격문 같은 성명서를 냈다. 인격 살인이라고, 진상을 규명하라고.
이선균의 죽음은 인간 존엄을 짓밟은 결과이자, 인격과 인권의 죽음이었다. 그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일은 인격적 살해가 반복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은 밥으로만 살지 않는다. 공동체 내에서 존중받고, 구성원으로서의 인격과 인권 보장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도 인간 존엄이 무시된 사례는 적지 않다. 가령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인격이 없는 존재로 치부됐다. 인간이라기보다 물건이고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노예가 가혹한 백인 주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는데, 재판정에서 주인 자식들이 그 노예의 사형을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동정심이나 인도주의와는 거리가 먼 어이없는 이유였다. 집안의 재산이라 팔아먹어야 하는데 죽여 없어지면 큰 ‘재산 손실’이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 당시 나치 학살의 반인륜성도 인격 살해라는 문제와 겹친다. 나치는 죽이기 전에 인격을 말살했다. 학살의 상징 아우슈비츠를 탈출하던 유대인과 좌파 정치범 14명이 곧장 잡혀 온 일이 있었다. 공개 총살이라는 관례를 깨고 나치 장교가 탈주자에게 각각 한 명씩 ‘죽음의 동반자’를 고르도록 지시한다. 거부하면 14명이 아니라 몇 배가 넘는 50명을 골라서 같이 처형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결국 탈주자들은 한 명씩 골라 같이 총살된다. 선택은 일면 ‘합리적’이지만, 인간 존엄은 무참히 무너졌다.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에서 일어난 일도 있다. 나치가 외부와 담을 쌓아 게토를 격리했다. 자구책으로 아이들이 개구멍으로 나다니며 몰래 식량과 필수품을 들여왔다. 나치 경비가 아이를 하나 붙잡는다. 두 구역으로 나누어진 게토 사이의 육교를 지나던 폴란드인을 불러 그 아이를 밑으로 던지라고 명령한다. 거부하면 아이는 물론 너도 죽인다는 협박과 함께. 고민 끝에 결국 자기 목숨이라도 구하고자 눈을 감고 아이를 던진다. 그리고 며칠 뒤 자살한다. 인격 살해의 치욕을 씻고 인간 존엄을 지키는 길이었을까.
나치의 학살과 이선균의 죽음을 같은 선상에 놓기는 분명 어렵다. 역사적 대학살과 한 사람의 죽음을 같은 저울로 잴 수는 없다. 하지만 인권을 모독하고 인격을 살해하는 본질은 같다. 가해자가 버젓이 세상을 활보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또 쉽게 잊힌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참혹하다. 인격 살해를 주도하는 경찰이나 검찰 및 언론의 끔찍한 관행부터 확실히 끊어내야 한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해야 한다. 그 인격 살해의 대열에 당신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이선균의 죽음이 모두에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