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이자 작가였던 안톤 체호프의 희곡 ‘세 자매’에서 막내인 이리나는 끊임없이 모스크바를 꿈꾼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을 품고 시골에 사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갓 성인이 된 그녀의 마음은 모스크바의 화려한 도시 풍경과 활기에 떨리며, 그곳에서의 삶이 자신에게 더 큰 만족과 해소를 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상 그녀는 모스크바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아주 어릴 때 살다가 이제는 떠난 지 오래되어, 그녀의 기억 속 러시아의 서울은 미화된 과거의 추억에 불과하다. 그녀의 머릿속 모스크바는 사실에 기반을 둔 구체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모스크바는 단편적인 어릴 적의 기억 조각들로 이루어진 그녀의 환상이다. 어린아이의 흐릿해진 꿈 같은 것이다. 꿈에서 깬 아이가 꿈을 기억하려 애쓴들 이미지는 어느 먼바다의 안개처럼 멀어지고, 꿈에서 깨어난 아이가 다시 그 꿈을 이어서 꾸려 하는 것처럼 그녀는 모스크바라는 허상을 좇는다. 그녀가 모스크바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보랏빛 안개 같은 시간은 기억의 머리카락과 같은 것이어서, 자른 머리카락을 다시금 원래 모습으로 정돈한다 한들 엉키게 되듯 모호하고 부정확한 것이다.
나는 왜 서울을 꿈꿀까. 나쁜 공기, 숨 막히도록 가득한 사람들과 혼잡한 거리, 늘 서서 타는 대중교통과 지옥철, 비싼 물가와 생활비. 그런데도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이유를 살펴보면 다른 이들의 이유까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내 이유로는 추억, 열정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 다양한 문화적 자산, 트렌디함, 그리고 친구들이라는 이유가 있다. 아마 마지막 이유가 크지 않을까 싶다.
가장 먼저 추억이다. 이리나처럼 나에게도 추억이 있다. 서울은 열정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이 갖춰져 있다. 스무 살의 나에겐 수능이었다. 서울엔 최고의 강사들이 있었고 나의 지적 열망을 만족하게 하기에 딱 맞았다. 재수학원 근처엔 엄청 큰 서점이 있어 공부하는 틈틈이 다양한 만화를 보며 스트레스를 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지나치게 제한된 것만 누릴 수 있었던 재수생 시절의 몹시 제한적인 서울 경험이었음에도 그 작디작은 기억은 나에게 크나큰 추억이 되었다. 열정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절의 추억 말이다.
열정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이유일 것이다. 일도, 일자리도, 배울 사람도 많고 소통하며 함께 성장할 사람도 많다. 나 또한 배움을 위해 서울의 한 대학 연구실에 잠시 와 있다. 부산에 계신 교수님들의 권유로 말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친구들이다. 부산에 있을 땐 1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었던 고등학교 친구들을 현재 서울에 온 지 2달이 채 되기도 전에 벌써 10명이나 만났고 그중에는 졸업 후 8년 동안 못 본 친구들도 5명이나 있다. 부산에 살 때는 큰맘 먹고 KTX를 타야만 볼 수 있었던 친구들을 이제는 시내버스만 타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쉽게 볼 수 있었나 싶어 허탈함마저 느낀다.
무엇보다 어릴 적 친구들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이 있다. 시절을 기억하는 사이는 서로 존재의 연속성을 보호해 줘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만 같다. 또한, 대학에 들어오면서 건강이 안 좋아졌던 나로서는, 나의 괜찮았던 시절을 기억해 주는 고교 친구들이 함께였다면 회복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어릴 적 친구들이 서울에 있기에 내가 서울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나의 부산 지인들은 부산을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쌓아온 정서 기억을 그들에게는 부산이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야말로 ‘둥지’, ‘터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도시들이 있다. 어릴 적 정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도시 말이다.
사실 희곡 ‘세 자매’에서 모스크바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살던 세 자매의 정서 기억이 담긴 도시다. 아주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읜 이리나에게 모스크바는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이다. 그녀는 모스크바를 꿈꾼 것일까, 어머니의 품에서 잠들 수 있었던 어릴 적 이부자리를 꿈꾸듯 다시는 볼 수 없는 어머니를 꿈꾼 것일까. 나는 서울을 꿈꾸는가, 나의 친구들을 꿈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