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음악계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도쿄필의 연주를 늘 보고 싶어 했는데 지난 1월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사실은 몇 년전 예약까지 해놓고도 코로나19 때문에 포기해야 했기 때문에 밀린 숙제를 하게 된 개운한 느낌도 있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마침 그 기간에 NHK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있어서 일본을 대표하는 두 악단의 연주를 짧은 기간에 다 듣게 되었다. 음악적인 큰 호사를 누린 셈이다. 즐거움과 감동도 컸지만 많은 걸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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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
무엇보다 놀란 점은 먼저 이 두 악단의 역사였다. NHK가 2년 뒤면 창립 100주년이 된다고 하고 도쿄필은 올해가 창립113년째라고 한다. 이 두 단체의 역사를 보며 이들이 가히 일본음악의 산증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케스트라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살아남은 그 지역의 음악과 문화의 가장 뛰어난 구심체다. 오늘날의 일류 악단은 모두 그런 검증을 거치고 지금의 자리에 와있는 것이다. 이 두 악단의 연주를 보면서 그런 역사를 지켜온 고집과 신념, 그 곳을 거쳐 간 수많은 음악가의 음악혼, 뭐 그런 모든 것이 함께 녹아들어 명예롭고 뿌듯한 그런 자부심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리고 특히 노년층들의 청중이 많아 유럽의 음악회장과 느낌이 비슷했다. 그만큼 음악회를 즐기는 고정적인 청중이 많고 음악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또 하나 반갑고 놀라운 건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얼굴이었다. 도쿄필의 올 한 해 프로그램을 이끌어갈 다섯명 지휘자의 제일 위에 정명훈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명훈의 연주는 2월에 ‘봄의 제전’을 시작으로 투랑갈릴라 교향곡, 오페라 맥베스 등의 묵직한 작품으로 예정돼 있었다. 이 지휘자들은 명예음악감독, 계관, 수석, 특별지휘자 등 여러 명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프로그램이나 비중 등을 미루어볼 때 정명훈이 가장 중심이었다.
사실 정명훈과 도쿄필의 관계는 음악계에선 잘 알려진 일이지만 그것이 어느 새 24년이 되었고 아직도 그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라웠다. 그것은 일상적인 관계는 아니며 특별한 의미를 충분히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다. 팸플릿에는 ‘진화하는 정명훈과 도쿄필’, ‘유일무이한 일체감과 집중력’이란 무게있는 제목으로 그 의미를 집중 조명하고 있었다. 정명훈은 인터뷰에서 “인간관계에는 신뢰가 가장 중요하고 거기까진 시간과 단계가 필요하다. 나는 모든 단원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고 그간의 소회를 밝히고 있고 또 이들의 관계에 대해 평론가는 “이제 도쿄필과 정명훈의 연주는 열연이나 쾌연을 넘어서서 숙연(熟演)이다. 그들은 진화하고 있다”는 인상적인 표현을 남기고 있었다. ‘숙연’이란 일반적인 수사는 아니다. 그러나 보통 좋은 연주를 말하는 열연같은 단계를 넘어서서 이제는 서로가 익숙하고 능숙한, 그래서 굳이 말이 필요없는 그런 이심전심의 단계를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음악가들 모두가 추구하는 최상의 단계, 궁극의 경지가 아닐까?
그러나 현실의 악단과 지휘자는 애증의 관계일 때가 많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인 보리스 슐릭은 “지휘자는 가상의 적이다”는 표현도 하고 있다. 지난 세기는 음악적 전권을 쥔 지휘자들이 마음껏 자신의 음악을 펼쳐나가던 전설의 시대였다. 유진 오르만디 같이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무려 44년간 지휘를 한 그런 사례도 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고 대체적으로 지휘자와 악단은 파트너의 관계다. 그래서 전설이 때로는 그리운 이 시대에, 정명훈과 도쿄필이 만들어가는 이 새로운 전설은 우리에게 더욱 어떤 명예로움과 뿌듯함을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