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도시에 관심이 많은 필자는 ‘전통’이란 말을 무척 좋아한다. 또한 옛 것에 바탕을 두고 새롭게 계획하는 일을 업으로 삼기에 ‘창조’라는 말도 매우 좋아한다. 그런데 두 단어의 결합, 즉 ‘전통의 창조’나 ‘만들어진 전통’이란 말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다. 이 속에는 가짜 또는 과장된 전통 더 나아가 왜곡된 역사가 내포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먼지가 쌓인 서가에서 에릭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이란 책을 꺼내 들었다. 현대인이 따르고 있는 오래된 전통이 가진 허상에 대한 날카로운 시각 속에서, 그 전통이 현대인의 공식기억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파헤친 책이다.
20여 년 전에 만난 이 책을 통해 역사와 마주할 땐 진실해야 함을 배웠고, 매순간이 역사 창조의 순간일 수 있기에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붉은색으로 줄 쳐진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산업혁명으로 도시화가 진행되고 새로운 국민국가가 대두되는 급변하는 사회 가운데 필요했던 것은 안정이었고, 그것이 전통이 창조되어야 할 이유였다’.
저자는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격자무늬 천으로 만든 킬트가 고대사회부터 생산된 천과 옷이 아니라 18,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소개하고, 영국의 왕실 의례 또한 천년의 전통이 아니라 19세기 후반의 것이라 말한다. 집단기억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전통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또한 책은 발명된 전통들이 역사와 동떨어진 채 조작되고 통제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부산항 제1부두 앞에 자리했던 ‘옛 부산세관을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십 수 년 전 북항재개발 사업이 시작될 때부터 주창된 염원이었지만, 최근 지역사회에서 논의가 본격화 되고 있다. 1979년은 부산대교를 얻고 옛 부산세관을 잃었던 해였다. 당시는 지역을 살린다는 명분의 다리 건설을 위해 문화재 지정을 취소하고 철거 또한 당연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 세상이 크게 바뀌었다. 원래 자리는 아니지만 복원이 가능한 땅이 생겼다. 설계도면과 사진들도 있다. 무엇보다 복원을 염원하는 시민의 단합된 애절함이 있다. 분명 복원 추진의 호기이다. 그럼에도 걱정이 있다. 자칫 복원의 결과가 단순 재현의 수준에 머물거나 가짜 전통으로 판명된다면 지금의 기대치를 부산이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염려다.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복원이 가짜 전통이 되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그리고 진정한 새로운 전통이 되도록 할 강력하고도 응집된 힘을 모으는 것이다.
이의 출발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먼저 상이한 이해관계와 관점이 다른 시민이 동질성을 갖도록 하는 명확하고도 포용적인 복원 이유를 정립하는 일이다. 복원이 과거로의 단순 회귀가 아니라 1407년 국제교류항구로 명명된 부산포(항)의 역사를 뚜렷이 드러냄과 동시에, 복원 후 부산항의 미래를 진지하게 상상하고 또 펼쳐갈 수 있는 장(場)으로서의 역할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요청은 복원에 대한 염원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옛 것에 대한 향수와 다소 억울하게(?) 해체되었던 옛 부산세관에 대한 회한 풀기를 넘어, 일반화된 도시개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지역 정체성 발로의 애끓는 표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보다 넓은 시민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는 실용적인 차원에서의 복원 이유도 필요하다. 복원이 북항재개발 1단계사업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의 기회로 여겨지면 어떨까. 더 나아가 부산항 브랜딩, 즉 무한한 문화·경제적인 지역 발전의 원천이 될 것으로 증명되면 어떨까. 그 후광효과가 이론이나 구상 수준이 아니라 숫자로 명확히 밝혀지면 바랄 것이 없겠다.
그 일을 누가 해 냈다고 치자. 다음 과제는 진짜 전통을 만들기 위한 복원의 방법과 과정에 대한 고민이다. 갑자기 머릿속에 세계인이 기억하는 위대한 복원 사례 두 곳이 떠오른다. 바르샤바(폴란드) 도심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폭격으로 85% 이상이 파괴된 후, 5여 년 동안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복원된 결의의 현장이다. 모스타르(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스타리 모스트 다리는 보스니아 전쟁 때 반파된 후 국제사회의 협력으로 복원되어 다문화의 공존과 인류 화해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두 곳의 공통점은 ‘합심(合心)으로 이룬 결과’라는 점이다. 옛 부산세관의 복원은 시민 합심이 강력한 추진체가 되어야 한다. 복원의 수혜자가 지금의 우리가 아니라 태평양 시대를 열어 갈 부산의 미래세대가 되어야 하고, 그들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나아가 복원의 결과는 단순 재현이나 치적이 되지 않아야 하고, 불꽃 튀는 문화접변을 이루며 미래 바다를 꿈꿀 수 있는 첨단이 되어야 한다.
옛 부산세관에서의 복원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롭고도 진정한 전통을 창조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분명 이 복원은 부산과 부산항에 새로운 전통을 선사해 줄 것이다. 그 역사의 순간순간을 시민들이 합심으로 써내려 가야한다. 직접 그리고 진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