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어린 시절 졸업식 때 ‘석별의 정’이라는 노래를 친구들과 함께 부른 기억이 있다.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올드 랭 사인’이라는 스코틀랜드 민요 5음 음계의 곡조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가 정식국가로 채택되기 전까지는 애국가 가사를 붙여 애국가로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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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부산 문화회관에서 열린 김지윤 피리독주회에서 백현주 작곡가의 ‘피리와 피아노를 위한 영천아리랑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 연주되고 있다. |
1902년 애국심 고취를 위해 독일인 에케르트가 서양식으로 작곡한 우리나라 최초 애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금지곡이 된 이후 올드 랭 사인이 사람들의 구전으로 애창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3.1운동 때 당시 현장에 있었던 외국인 칼턴 왈도 켄들이 1919년에 발간한 ‘The Truth About Korea(조선의 참모습)’에 남녀노소 행렬이 이어지며 올드 랭 사인의 선율에 맞춘 애국가를 부르며 깃발을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고 언급이 되어 있다. 스코틀랜드의 노래가 100여 년 전 멀리 동양의 한 나라에서 애국가로 불려진 것이다.
이처럼 특정 지역의 노래가 전혀 다른 곳에서 불려진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경상북도 영천지역에 살다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탄압을 피해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한 선조들이 불렀던 ‘영천아리랑’이라는 노래가 그 주인공이다.
경상도 지역의 영천아리랑이 어떻게 만주에서 불리게 되었을까?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의 농업 이민정책으로 조선인들은 만주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게 된다. 1983년 발간된 ‘경상북도사’에 의하면 1931년 만주사변 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만주 지역에 조선인을 이주시켰고, 만주와 근접한 지역을 제외하고 경남·전라남북도에 비해 경북 사람이 약 4배에 달할 정도로 가장 많이 이주했다고 한다. 이들이 정착한 중국 동북 3성 중 북쪽 지역인 흑룡강성을 중심으로 고향을 그리며 부르던 영천아리랑이 조선족 사회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이후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이 군가로 사용하면서 북한으로 유입되어 북한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정작 남한에서는 전승이 끊어져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영천아리랑은 2000년 평양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서 북한예술단의 공연 이후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영천아리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경서도 민요 전문 소리꾼에 의해 불리면서 또 하나의 아리랑 레퍼토리로 정착되었다. 영천지역에서는 영천아리랑보존회가 발족되어 매년 영천아리랑 전국경창대회가 개최되고, 영천아리랑의 학술연구를 통해 100년에 걸친 음악적 특징을 밝힐 수 있었다.
필자는 2021년도 피리독주회에서 백현주 작곡가의 ‘피리와 피아노를 위한 영천아리랑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개작초연한 바 있다. 작곡가는 이역만리 만주 벌판에서 고향을 그리며 조국의 독립을 꿈꾸던 선조들의 설움이 가슴 아프게 와닿아 이 곡을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이 한 곡의 노래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돌고 돌아 강인한 생명력으로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