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 지인이 이 ‘사건’을 이야기 해 주었다. 지난 8월 5일 부산도시공사가 행복주택의 잔여세대 추가 모집을 했는데, 그 방식이 현장 방문 ‘선착순’이었다. 그래서 그 청년도 아침 8시께 신청하러 현장 방문을 했으나 이미 그 현장을 둘러싸고 1㎞ 이상 이어진 줄을 보고, 차를 돌려 집으로 되돌아 왔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탁상행정은 현장 신청자들의 분통을 터뜨리게 했다(국제신문 8월 5일자 ‘이 땡볕에 수천 명 줄 세우다니…분통 쏟아진 행복주택 접수’). 그리고 이 사건을 둘러싸고 연관된 전세사기에 대한 대응을 두고 한 칼럼은 “이 도시에서 행복주택은 선착순, 투자소득은 탈출순”이라고 일침을 놓았다(국제신문 8월 11일자 칼럼 청년의 소리 ‘행복은 선착순이 아니잖아요’). 그 이후에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전해주는 보도는 없다.
개인적으로 이 사건에서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지난 여름, 그 뜨거운 땡볕에서 내 집 하나 마련하겠다고 현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은 정말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내 집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없는 사람들끼리 선착순으로 줄을 세우고, 그 마저도 무효이며, 청약일 마저 연장해서 변경하니, 울화통이 터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공사(公社)는 시민의 공공의 안녕을 위한 기업인데, 자기들 편한대로 행정을 진행하다니.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이 사건에 대한 분통을 가라 앉히면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을 천천히 바라보고자 한다. 객관적인 지표로 우리의 도시에는 이미 가구수보다 더 많은 주택이 있으며,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당한 수의 공실(空室)이 있다. 사회적인 지표로 수많은 청년이 비혼이나 미혼을 선택하는 다양한 이유 중에 ‘내 집 마련’이 어렵기 때문인 이가 많다.
현실적인 지표로 우리 도시는 초고령화 사회에 가장 빨리 도달했는데, 이는 청년이 이 도시를 탈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지표들은 우리 도시가 암울한 도시가 되고 있음을 반증한다. 곧, 이 도시에는 집과 공실이 많지만, 내가 살 수 있는 ‘주택’은 없다. 혼인은 고사하고, 이 도시를 떠날 수 밖에….
여기서 자금의 흐름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이미 본가로부터 독립한 청년들은‘ 내 집 마련’을 목표로 하지만, 이 목표를 이룰 목돈이 없어서 월세 형태의 임대를 할 수 밖에 없다. 고맙게도 국가나 지방자치 단체는 다양한 경로로 청년을 위한 많은 종류의 지원금을 제공하는데, 이 지원금은 그들에게 쌓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월세로라도 ‘내 집 마련’을 해야하는 청년들은 어떻게든 임대업자에게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청년을 위한 지원금은 임대업자의 수익으로 쌓인다. 청년을 위한 지원금이 청년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기성 세대를 부양하는 지원금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자금의 흐름은 부동산의 거품을 연명하려는‘주택 계획’에 대한 임시방편임이 명확하다.
열심히 1980년대를 산 이들(60대 이상)은 고생하며 일한 만큼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인 듯 하다. 그리고 부동산에 대한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사라진 그 시절 이후, 오늘날의 ‘내 집 마련’의 꿈을 낙태하게 한 이들이기도 하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평균 임금으로 한 푼도 쓰지 않고 10년을 모은다고 해도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결혼이 늦어지거나 포기하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큰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청년을 위한 지원금들은 우리 사회가 그들을 아끼고 있다는 최소한의 표시이다. 절박한 청년에게 이 지원금들은 큰 힘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지원금이 특정한 누군가를 위한 부양 기금으로 활용되어서는 안된다. 담대한 계획을 도모해야 한다.
‘주택’에 대한 청년의 부담이 사라질 방법은 없을까? 청년을 위한 지원금들의 개인적인 분출보다는 기금의 통합으로 행복주택을 더 많이 제공하면 어떨까? 여기에 시민과 사회의 재원이 추가되어 행복주택이 더 많이 공급된다면 암울한 도시의 이미지는 공생의 이미지로 변환될 것이다. 물론, 선정 방식은 여전히 문제가 되겠지만 그 문제보다는 훨씬 더 높은 시민의식을 신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