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5일은 스티브 잡스의 기일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11년에는 전 세계가 떠들썩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잡스에 대한 책자와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를 표현하는 수식어로는 ‘창조의 카리스마’, ‘혁신의 아이콘’, ‘융합의 전도사’, ‘프레젠테이션의 귀재’ 등이 있었다.
잡스는 여러 인상적인 프레젠테이션을 남겼다. 2007년에 있었던 아이폰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은 그 대표적인 예다. “오늘 우리는 혁신적인 제품 세 가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첫 번째는 터치로 조작하는 와이드스크린 아이팟입니다. 두 번째는 혁신적인 휴대전화이지요. 그리고 세 번째는 완전히 새로운 인터넷 통신기기입니다. 뭔지 아시겠습니까? 세 개의 기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구현한 하나의 기기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이폰’이라 부릅니다.”
이처럼 아이폰은 미디어 플레이어, 휴대전화, 인터넷 통신기기 등이 결합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잡스가 새롭게 발명한 것은 없으며 단지 기존 기술을 합쳤을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잡스는 “뛰어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 피카소의 말을 인용했다가 큰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기존 기술을 결합하는 것도 새로운 기술이다. 게다가 하나의 구성요소를 개발하는 것보다 여러 구성요소를 연결해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더욱 난도가 높다.
필자에게는 이보다 더 인상적인 프레젠테이션이 있다. 잡스가 2011년 3월 아이패드2를 공개하면서 선보인 프레젠테이션이다. 짙은 바탕의 화면 위에는 두 개의 방향을 가리키는 교차로의 표지판이 엇갈려 있다. 거기에는 각각 ‘기술(technology)’과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라고 씌어 있다. 잡스는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어내는 비결을 기술과 리버럴 아츠의 결합에서 찾았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으로 소개되었지만, 리버럴 아츠를 번역하면 인문학이 아니라 교양이 된다.
교양교육이 역사상 처음으로 제도화된 공간은 중세대학이었다. 중세대학에는 대체로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 교양학부의 네 학부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 쓰는 사각모가 네 학부를 상징한다는 흥미로운 전설도 전해진다. 네 학부 중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행사했던 곳은 교양학부였다. 모든 학생들은 교양학부를 이수해야 했으며, 그다음에는 교양을 계속하거나 신학 법학 의학을 전공했다.
중세대학의 교양학부가 개설한 과목은 ‘자유칠과(seven liberal arts)’로 불렸다. 그것은 대체로 문법 수사 논리의 3학(三學, trivium)과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의 4과(四科, quadrivium)로 구성되었다. 교양학부의 자유칠과는 ‘자유인’이라면 반드시 익혀야 할 과목으로 간주되었다. 자유칠과를 통해 교양을 갖춘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구별되어 자유인의 대접을 받았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중세대학이 오늘날의 인문학뿐만 아니라 과학도 교양의 중요한 영역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교양의 구체적인 목록이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교양이 여러 분야를 두루 포괄해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나의 전공은 다른 사람에게는 교양”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사실상 교양은 나의 전공이 아닌 모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 인물이 잡스이다. 그에게는 기술을 제외한 모든 것, 즉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 등이 교양에 속했다.
잡스의 아이패드2 프레젠테이션에서 표지판에 등장하는 숫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술에는 ‘600’, 교양에는 ‘1500’이 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잡스는 기술보다 교양으로 가는 길이 훨씬 많이 남았다는 점을 강조했던 셈이다. 그만큼 교양의 길은 멀다. 교양을 평생 갈구하고 우직하게 쌓아나가야 한다. 나에게 어떤 교양이 있는가, 나는 교양을 잘 활용하고 있는가 등과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제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