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노’.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대통령 관련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몹시 분하고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오름’. 국어사전의 뜻풀이다. 사실 궁금했다. 시정잡배도 아닌 국가 최고통치자. ‘도대체 어떻게 하길래 툭하면 격노설이 나올까’라고 말이다.
지난 3일 늦은 밤 느닷없는 대통령의 계엄 선포 담화문. TV에 비친 얼굴은 도리도리를 빼곤 나름 차분했다. 말투도 여느 때와 달리 또박또박 신중했다. 반면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소굴’ ‘패악질’ ‘원흉’ ‘척결’ ‘전복’ ‘준동’ 등. 일상 대화에서도 조심스러운 단어가 줄줄이 등장했다. ‘반국가세력’ 야당에 켜켜이 쌓였던 대통령의 격노. 정말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아마도 대통령은 시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했을 것이다. 군 통수권자 명령에 충실한 군대가 ‘나를 지켜줄 것이야’라고. 실제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로 들이닥쳤다. 1981년 1월 마지막 계엄 해제 이후 무려 43년만이었다. 본관 창을 부수고 들어가는 걸 보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을지도 모른다. 국회를 비롯한 일체 정치활동을 금지한 포고령 1호. ‘이게 지금처럼 작동한다면 무조건 성공이야.’ 득의만만한 표정까지 떠올렸을 법하다.
아무리 계엄 상황이라도 군의 국회 출동은 명백한 위헌이다. 헌법은 계엄 때 ‘정부나 법원에 대해’ 군이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제77조 3항). 반면 입법부에 대한 조치 규정은 없다. 왜 그랬을까. 같은 조 5항을 보면 이유가 명확해진다.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권에 대한 국회 견제권을 보장한 대목. 따라서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봉쇄할 우려를 차단키 위해 입법부를 예외로 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포고령 1호는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이를 깡그리 무시한 채 국회에 들이닥친 군인들 목적은 빤하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를 원천 봉쇄하기 위한 것. 군은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 체포조까지 출동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친위쿠데타’라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1980년 5·17계엄 전국확대조치 당시 무력으로 국회를 폐쇄했던 전두환 노태우. 이들이 나중 처벌받은 죄명은 바로 내란죄였다.
평생 검사만 한 대통령. 이런 헌법 조항을 몰랐을까. 천만의 말씀. 알고도 그냥 밀어붙인 것이다. 자신의 격노에 움찔하곤 했던 참모들. 그들의 반대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위험천만한 대통령의 일탈. 이를 제동하지 못한 건 국무위원도 마찬가지다. 헌법은 계엄 발동 조건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제77조 1항)로 못 박고 있다.
대통령이 계엄 선포로 내세운 이유는 대략 4개. 감사원장과 검사 탄핵, 야당의 감액 예산안 단독 처리, 아내에 대한 특검 추진, 이재명 민주당 대표 방탄 등이다. 모두 헌법과 관련 법률이 규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사안이다. 물론 이에 대해 비판과 불만을 가질 순 있다. 하지만 계엄으로 뒤엎겠다는 발상은 헌법 정면 위배다. 어떻게 야당의 국회 활동이 전쟁 발발에 버금가는 국가비상사태인가. 이로 인해 사회의 안녕과 질서가 깨졌는가. 그리고 질서를 세우기 위해 병력이 필요한 상황인가. 도대체 말인가, 막걸리인가. 아마도 다수 국무위원도 이렇게 생각했던 듯하다. 계엄 선포 당일 은밀히 소집된 임시국무회의. 대통령의 계엄 추진에 반대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대통령은 ‘고(GO)’를 외쳤다. 사실 국무회의는 국정 심의기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거의 ‘막가파식’ 대통령의 계엄 선포.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 파장이 만만찮다. 먼저 대한민국엔 자폭행위가 돼 버렸다. 환율 주가 등 실물 경제시장이 휘청거렸다. 대외신인도 역시 흔들릴 우려가 있다. 졸지에 세계적 망신거리로 전락했다. 한국이 ‘여행제한 국가’로 지목됐다. 4일 스웨덴 총리의 방한은 무기 연기됐다. 대통령 자신에겐 자해한 셈이 됐다. 당장 ‘사법리스크’가 발등의 불이 됐다. 내란 혐의로 몰려 바로 소추당하게 생겼다. 정치적 책임도 크다. ‘즉시 하야’의 요구가 거세다. 버틸 기미에 야당은 즉각 탄핵 추진에 들어갔다. 흔들리는 여당 의원 수를 감안할 때 가결도 예상된다. 명백한 위헌인지라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될 가능성도 크다.
이렇게 ‘윤석열 아웃’시키면 ‘상황 끝’일까. 문제의 대통령은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대통령을 낳은 정치적 구조는 여전히 ‘그대로’다. 이른바 승자독식과 제왕적 대통령. 이게 대통령의 무소불위 권력을 낳는다. 이번 사례가 증명하듯 폭주를 전혀 제어하지 못한다.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얘기다. 대통령 탄핵 못지않게 이번 기회에 대대적 권력구조 개편 작업을 꼭 이뤄내야 한다. 개인적으론 타협을 유도하는 의원내각제를 선호한다. 문제는 국민이 무척 생소하게 여긴다는 점. 어렵다면, 분권형 대통령제라도 도입해야 한다. 의회 또는 지방정부와 권력을 나누는 방안이다.
이번 사태는 분명 위기다. 한편으론 기회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오만과 독주. 이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을 이룬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