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몇 시간 만에 이를 해제하면서 온 나라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대외 신인도는 급격하게 추락했고, 국민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정치 지도자의 결정이 사회 전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리더십 부재가 어떤 사태를 초래하는지 이번 일로 여실히 드러났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로 묻히기는 했지만, 지도자의 리더십 부재 문제는 부산에서도 불거졌다. 지난달 22일 부산시의회는 도시계획 조례 개정안의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애초 시는 20년 전 기초단체장에게 위임했던 폐기물 처리시설 궤도시설 도축장 묘지공원 등 이른바 기피시설 결정권과 사업시행자 지정 및 시설계획 인가권을 다시 시장에게 환수하기 위해 조례 개정을 추진했다. 지역 갈등을 유발하는 시설의 허가를 시장이 가져 갈등 조정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였다. 조례안은 시의회 소관 상임위인 해양도시안전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회의에 상정된 것은 ‘수정안’이었다. 산업폐기물 매립장 후보지로 꼽힌 기장군의 정종복 군수가 상임위 심사 전 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했고, 심사 당일에는 주민 300여 명이 ‘조례 개정 결사 반대’를 외치며 반발했다. 이에 기장을 지역구로 둔 박종철 시의원이 시가 설치 권한을 갖는 기피시설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수정안을 냈고, 본회의에 상정돼 통과됐다. 이에 따라 궤도시설과 도축장 결정권만 시장에게 환원하고, 폐기물 처리시설 등 나머지 기피시설은 기초단체장의 권한이 유지됐다. 상임위를 통과한 조례안을 제치고 급하게 만들어진 수정안이 통과되는 전례 없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형준 시장은 모호한 입장을 유지해 의구심을 자아냈다. 자신에게 돌아올 권한이 대폭 줄어든 상황에서도 별다른 입장 표명이 없었다. 시 관계자는 “애초부터 지역 주민과 충분히 소통하면서 조례안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이었다”고 밝혔다. 바꿔 말하면, 주민과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조례안을 마련했다가 강한 반발에 부딪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것이다. 일련의 사태에 ‘상임위 무용론’까지 대두되자 이에 격노한 안성민 시의회 의장이 박 시장에게 강하게 항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 주민의 반발로 원안이 아닌 수정안이 가결된 것을 문제 삼을 건 아니다. 사는 곳에 기피시설이나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환영할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박 시장이 철저한 준비와 주민 소통 없이 조례안을 마련했고, 결국 폐기됨으로써 행정의 신뢰도가 크게 떨어졌다는 점이다. 박 시장의 리더십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박 시장이 행정 신뢰를 스스로 떨어뜨린 건 비단 이번 일뿐만 아니다. 백양터널 유료화 유지 방침을 밝혔다가 주민과 언론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허겁지겁 무료화하기로 했다. 야심차게 추진한 구덕운동장 재개발은 또 어떤가.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국토부 공모에 탈락하자 못 이긴듯 계획 폐지 수순을 밟았다. 교정시설 이전 문제 역시 지난해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로드맵까지 마련했음에도 강서구의 눈치를 보느라 아직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상태다. 이들 문제 모두 시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다 주민과 이해 당사자의 반발에 부딪혀 무산 또는 답보 상태에 빠진 것으로 시의 오락가락 행정을 바라보는 시민은 혼란을 겪었다.
박 시장은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시민 의견을 수렴하겠다. 시민의 뜻에 따르겠다”고 몸을 낮췄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논란이 커진 뒤에야 떠밀리듯 사과하는 모습이 반복되면서 애초에 논란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또 기피시설 결정권 등 논란이 예상되는 민감한 사안을 추진하기로 했으면 강단 있게 밀어붙이는 것도 필요한데, 박 시장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보수진영 대권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3선 연임 도전을 기정사실화한 정치인으로서 박 시장의 리더십은 과연 시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이병욱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