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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도설] 선결제하는 마음

  • 최현진 기자 namu@kookje.co.kr
  •  |   입력 : 2024-12-17 19:10:11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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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집회·시위 현장에서는 빵과 우유, 김밥과 음료수가 돌았다. 데모하는 데 힘을 보태려고 곳곳에서 기부한 것들이었다. 지나가던 회사원들도 가세했다. 후배들 고생한다며 대학 선배들이 지갑을 열었다. 일부 다방에서는 차를 무료로 제공했다. 밥값을 받지 않는 식당 주인도 있었다. 지나가던 차들은 시위대를 향해 경적을 울리며 동참했다. 6월 항쟁은 그렇게 힘을 얻어 ‘87년 체제’를 세웠다.

37년 6개월이 흘렀다. 따뜻한 초여름이 아닌 영하의 추운 날씨다. 물 대신 핫팩(손난로)이 돌았다. 한 손에는 따뜻한 커피를 든 시위 참여자가 많았다. 자기 돈을 내고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공짜로 받은 사람도 있었다. “집회하러 왔어요. 민주 승리”라고 말하자 카페에서는 빵과 커피를 내줬다. 식당은 김밥과 먹거리를 공짜로 주었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그 돈으로 시위 참가자들에게 나눠 줄 음료가 더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100명 분의 커피값을 미리 낸 재미교포의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야당의 폭주를 막겠다며 저지른 비상계엄 사태 후 국회의사당 일대 가게 수십 곳에는 시위대를 응원하는 선결제 물량이 넘쳤다. 어디서 무엇을 나눠주는지를 알려주는 웹사이트도 등장했다. 이 사이트에 따르면 17일 현재 전국적으로 120명의 시민이 총 1만여 개의 상품을 결제했다. 가게 입구에는 ‘기부자의 요청으로 무료 커피·음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는 안내문이 붙었다. 부산 서면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때도 핫팩과 방석을 나눠주는 문화가 있었지만 선결제가 이처럼 광범위하게 진행된 사례는 없었다.

가수 아이유, 소녀시대 유리 등도 팬들을 위해 선결제에 나섰다. 영화감독 정치인 유명강사들도 함께했다. 일반인이 시작한 선결제 운동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 1030세대가 응원봉으로 대변되는 즐거운 집회시위 문화를 창출했다면 기성세대는 선결제로 화답했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겪으면서 선결제가 집회·시위 참여의 한 형태로 자리잡았다. 몸은 집회에 같이하지 못해도 어떻게 해서든 이에 기여하려는 마음이다. 공존과 공유의 정신이다.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응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연대의식이 들게 했다. 시위 참가자들은 작은 것이지만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아이돌 콘서트 같은 응원봉 시위에 이어 공간을 초월한 선결제 운동으로 세계에 ‘K-집회’라는 새로운 문화를 보여줬다.

최현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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