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은 영어의 ‘martial law’의 일본식 번역어이다. 계엄(戒嚴)을 한자 그대로 이해하면 ‘엄중하게 경계함’ 정도의 뜻이다. 정상적인 행정권이나 사법권이 중지되고 군이 통치한다는 본래의 무시무시한 뜻은 번역과정을 거치면서 희미해졌다.
‘계엄’은 대통령 민주주의 과학 시민 등 일본식의 서양 근대 용어 번역 단어 3000여 개와 함께 19세기 말 조선에 수입되었다. ‘계엄’이 처음 법조문에 등장한 것은 1899년 대한제국 헌법부터였다. 고종 이형이 군대와 보부상을 동원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폭력적으로 해산한 것은 ‘계엄법’ 등장 1년 전이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요구는 의회인 중추원 설립과 자유 민권이었다. 이들을 폭압적으로 진압한 뒤 1899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헌법을 공포한다. 9개 조항의 대한제국 헌법은 ‘전제정치’와 황제의 ‘무한 군권’을 선언한 뒤 제5조에서 이렇게 천명한다. “대한국 대황제(大皇帝)께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시어 편제를 정하시고 계엄(戒嚴)과 해엄(解嚴)을 명(命)하신다.” 민중의 열망을 통해 자주독립과 근대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기회는 그렇게 날아갔다.
1952년 5월 25일 이승만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공비 소탕을 명분으로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남, 전북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다음날 48명의 국회의원이 탄 출근 버스가 헌병대로 끌려가고, 이 가운데 야당 의원 12명이 국제공산당의 비밀 정치공작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국회는 계엄해제와 국회의원 석방 결의안을 의결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간단히 무시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쉽게 당선될 수 있는 직선제 대통령 개헌을 요구했다. 국회의원들이 시간을 끌자 임시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경찰과 계엄군을 동원해 강제연행을 시작했다. 먼저 잡혀 온 84명의 의원은, 정족수가 찰 때까지 이틀 동안 국회에 연금된 채 기다려야 했다. 7월 4일 밤 경찰이 국회 의사당을 완전포위한 가운데 166명이 출석해 표결이 이루어졌다. 표결방법은 기립 방식이었다. 반대표는 없었다. 기권도 3표에 불과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와중이었다. 국민의 어려운 삶은 아랑곳없이 이승만은 오로지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의회정치를 파괴한 것이다.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한국에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한 위대한 인물로 칭송하는 ‘국부 이승만’의 민낯이었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가장 많은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4차례나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아이러니하지만 국회가 계엄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이를 해제해야 한다는 헌법 규정을 만든 것도, 박정희였다. 폭력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계엄을 통해 만들어진 1972년의 유신헌법에서부터였다.
1978년 7월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99.9%의 지지로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하지만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 1.1% 더 많은 표를 얻는다. 유신체제에 대한 민심이반의 분명한 증거였다. 다음 해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이른바 ‘부마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저항이 일어났다. 10월 18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부대 5000명이 투입된다. 계엄은 무려 450일간 지속되었다.
2024년 12월 3일 밤의 계엄은 한국의 계엄사에 여러 기록을 남겼다. 가장 짧은 6시간 만에 끝났고 계엄군의 국회 진입이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이를 본 시민이 뛰쳐나오면서 계엄을 통한 헌정 파괴 책동이 좌절되었다.
고종부터 윤석열까지 계엄을 선포했던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곧 국가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왕정이 끝난 뒤 선출된 이들조차 ‘투표로 뽑힌 왕’들이었다. 부끄러움은 몰랐고 듣기 싫은 말에는 ‘격노’했고 아부에는 이권이나 자리로 보답했다. 또 다른 공통점은 고종 시대를 제외하면 계엄 선포 핑계가 공산당 척결과 자유대한민국 수호였다. 윤석열도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겠다는 이유였다. 그들 스스로가, 그들이 선포한 계엄이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고종 이후 이들 계엄 주도세력의 세 번째 공통점은 친일적 경향이었다는 것이다. 반일을 외쳤던 이승만은 친일파중심으로 권력을 운용했다. 박정희 정부 2인자였던 김종필은 한일협정에 방해가 된다면 독도를 파괴해버리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탄핵으로 인한 윤석열의 퇴진은 일본 정부마저 안타까워하고 있다. 윤석열정부 외교정책 실세였던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과거사 문제 사과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다”고 할 정도로 국민 정서보다 일본을 중요시했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틀렸다. 역사는 비극 다음에 희극이 오는 확률 게임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국민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는 비상계엄만 무려 10번이 선포되었다. 대부분 군부 독재세력이 권력을 뺏거나 유지를 위한 내란이었다. 청산되지 않는 과거는, 처벌받지 않는 내란 집단은 늘 다음 기회를 노린다. 윤석열의 내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