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을사년이다. 120년 전, 대한제국의 주권이 찬탈당한 해도 을사년이었다. 을사늑약을 통해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며 한순간에 세계사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36년간의 강점기, 남북한의 이념 분단, 그리고 처참했던 한국전쟁은 5000년 역사의 우리 민족을 무참히 짓밟았다. 오욕의 역사에서도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경이로운 기록을 만들어가며 ‘주권찬탈 100년 만에’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자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세계사는 강대국의 부침에 따른 역학 구도의 변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격변기였고, 그 시기를 견뎌낸 우리나라는 교과서에 기록될 가장 혁신적인 국가발전의 아이콘이 되었다. 저력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가히 ‘기적의 역사’다.
과학기술과 산업의 변천사는 그야말로 경천동지 수준이다. 기계장치 사용이 겨우 200~300년 전인데 지금 인류가 보유한 기술과 산업은 이미 우주를 향하고 있고, 산업을 지탱하는 에너지의 변화 속도는 가늠조차 하기 힘들다. ‘프로메테우스의 선물’ 불을 지키려는 노력은 에너지의 개발·활용을 통해 수만 년 동안 화석 에너지 시대를 밝혀왔다. 하지만 불과 100년 사이에 등장한 친환경 에너지는 장구한 화석 에너지 시대의 일몰까지 예고한다.
에너지 변화의 흐름에 가장 민감한 자동차 산업은 ‘변화 중국 탄소’라는 올해의 화두를 받아 들었고, 글로벌 자동차 산업은 해결 방안을 찾고자 무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한 치 앞 예상도 힘든 트럼프 2기의 산업계는 보호무역을 앞세운 국가별 경쟁의 격랑을 마주하겠지만, 생존을 위한 ‘합종연횡’과 ‘오월동주’도 무릅쓸 만큼 필사적이다. 조선해양산업 역시 격동기를 맞았고, 이 역시 자국 산업 보호와 트럼프 2기의 불확실성이 가져온 결과다.
지난해 말 인도 조선산업 수뇌부들로 구성된 방문단이 우리나라를 찾았다. ‘신규 상선 1000척 확보’를 위한 건조 조선소와 조선업 육성 파트너 확보가 목적이었다. 인도는 국가 무역의 95%를 해운에 의존하지만, 선박 건조 능력 부족으로 선박 임차에만 연간 100조 원 이상을 쓰고 있다. 조선산업 경쟁력 강화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 2030년대 GDP 기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다는 인도는 조선산업에 기반을 둔 해양정책으로 경제패권 프레임을 완성해 가려 한다. 그 인도가 우리에게 드러내 놓고 SOS를 보냈다.
미국 조선 시장의 상황은 더 드라마틱한데, 법안과 정책의 변화가 그 시작점이다. ‘미국 선박은 미국 내에서만 건조하고 수리해야 한다’라는 존스법에 오랜 기간 발목이 잡혀, 막강 해군력은 쇠퇴했고 대(對)중국 해양 경쟁력의 상실도 우려됐다. 급기야 미 정부는 우리나라와 일본에 미 해군 함정 MRO(유지·보수·정비)를 열어주기까지 이르렀다. 한발 더 나아가 지난해 말에는 ‘미국 번영과 안보를 위한 조선업과 항만 인프라 법안’이 의회에서 발의되었다. ‘전략 상선단 프로그램’을 통해 미 상선 250척을 조성한다는 법안이고, 존스법 적용 면제 유예까지 주면서 외국 건조 선박도 임시 선박(interim vessel) 지위로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세계최고의 우리나라 조선소들이 MRO에 뛰어들었고 미국 내 노후 조선소 재건까지 해주고 있다. 조선산업 재건과 함께 중국과의 해양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유지하려는 해양정책 밑그림이다.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인도의 공통 관심사는 해양 경쟁력 확보다. 해양 경쟁력의 원천이 완성형 조선산업 생태계 구축인 것을 알고 있기에 미국과 인도는 전략적 파트너로 우리나라를 선택했다.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기술과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20년 전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는 ‘한의 을사년’이었다. 2025년 을사년이 트럼프 2기와 함께 극한의 불확실성으로 문을 열었다. 불확실성의 원천인 트럼프 당선인조차 자신의 임기 동안 대표적 국제 협력 분야로 ‘코리아 조선산업’을 콕 집어 러브콜을 보낼 만큼 지금 우리는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다. 한반도 일거수일투족이 세계 각국 뉴스에 실시간으로 등장하는 오늘 같은 시대가 역사적으로 한 번이라도 존재했을까. 1907년 헤이그에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피력하다 ‘신사의 나라 영국’과 ‘찬탈 당사국 일본’에 밀려 좌절하고 말았던, 그래서 힘과 이익을 따르는 세계정세 속에서 피눈물을 흘렸던 세 분의 특사들은 후손들의 오늘을 예견했을까.
중국과의 출혈 경쟁은 모든 산업군의 화두다. 그래도 대한민국 조선해양산업만큼은 친환경선박 기술을 무기로 ‘아직은’ 중국을 따돌리고 있고, 세계 경제 대국들이 우리나라 조선해양산업을 추종하며 따르려 하고 있다. 그 어떤 제조업보다 탄탄한 기술력과 시장경쟁력을 보유한 대한민국 조선해양산업은 잘 벼른 칼과 잘 기른 장수들도 준비시켜 두고 있다. 세계정세와 산업의 변화를 읽어내고 자국 산업을 이끌어야 하는 정책의 결정은 위정자의 몫이겠지만, 정책 시행의 결과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온다. 트럼프의 러브콜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을까. 시의적절한 ‘우리’ 해양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