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추위가 지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겠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글이다. 살면서 느끼는 이치다. 큰 시련이 닥쳤을 때에야 누가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지 알 수 있다. 공자 당시 ‘백(柏)’은 중국 측백나무를 의미했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한국 잣나무를 지칭했다고 한다.
세한은 설 무렵 추위다. 일년 중 가장 춥다. 올해도 어김없이 대설경보가 내려질 정도로 엄동설한이었다.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 선생이 이 내용으로 ‘세한도’를 남겼다. 정적에게 모함을 당한 그는 지인 상소 덕에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대신 제주도 오지에 위리안치됐다. 가시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형벌이다. 제주 유배 시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제자 이상적만이 위험을 무릅쓰고 방대한 양의 중국 서적을 구해 보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심지어 하우경이 편찬한 120권짜리 ‘황조경세문편’도 있었다. 선생은 고마움을 세한도로 표현했다. 인생 황금기 대부분을 오지에서 유배(3회 12년)로 보냈으니 억울했을 것이다. 유배라는 추위를 겪은 후에야 누가 진정한 자신의 소나무와 잣나무인지 알게 됐다. 제자는 세한도를 들고 중국에 가서 유명한 문인 16명에게서 평가를 받아왔다. 조선 문사 4인의 감상글도 보탰다. 국보 180호가 된 사연이다.
현재 한국 민주주의는 추사가 겪은 세한 못지 않다. 절체절명의 위기다. 윤석열 대통령이 야당 경고와 부정선거 규명을 위해 벌인 비상계엄으로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이 일로 헌정사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대통령은 6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느냐며 항변했다. 현직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내란이 될 수 없다고도 했다. 군 사령관, 경찰청장, 국정원 1차장 등의 증언이나 검찰 조사 내용을 종합하면 6시간짜리가 아니었다. 국회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언론을 검열하며, 의사들을 처단하려고 했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지금 이 글도 신문에 실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직 대통령이라도 계엄이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이었다면 내란이다. 내란으로 결론이 나지 않더라도 윤 대통령의 행위가 헌법에 위배되면 탄핵 인용이 불가피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쳤던 대통령에 의해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있다.
서울서부지법 난동은 한국 민주주의 취약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윤 대통령 지지자들은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심사하던 법원에 난입해 집기를 부수고 불까지 질렀다. 폭도들은 영장을 심사하던 부장판사를 찾으러 다녔다. 일부는 판사실에 들어가 중요 문서를 훼손했다. 63명이 이 일로 구속됐다. 하루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처럼 많은 사람이 구속되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을 향한 회피 촉구와 비난 역시 법치를 뒤흔드는 일이다. 국민의힘과 윤 대통령 측은 법 절차를 밟아 임명된 재판관 흠집내기에 혈안이다. 야당 대표와 친하니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배우자와 동생이 문제라 심판에서 빠져야 한다고 한다. 친북·종북 프레임마저 씌운다. 탄핵을 인용하면 불복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현대민주주의는 법치와 대화로 구현된다. 불만이 있다면 법률에 근거해 자기 주장을 펼쳐야 한다. 특히 폭력으로 이를 실현한다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비상계엄을 발동한 대통령과 법원에서 폭력을 휘두른 무리는 다를 바 없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저서 ‘넥서스’에서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3대 자정장치로 법원 언론 대학을 꼽았다. 법원의 자정 기능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독재자는 법원의 권한을 박탈하거나, 그렇지 못할 때는 자기 사람으로 채운다.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 법원이 권력 편을 든 적이 한두 번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유지된 것에 법원이 차지한 몫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라리는 또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다. 대화로 그 오류를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화를 싫어하는 자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윤 대통령이 도어스테핑을 할 때만 해도 국민과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MBC를 핑계로 이를 중단한 대통령은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대화를 거부했다. 사람들과 만날 때 남의 얘기 듣지 않고 혼자 말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그룹을 승계하는 이건희 회장에게 했던 말이 ‘경청’(傾聽)이었다. 그만큼 듣는 게 어렵다.
윤 대통령의 탄핵 심판은 문형배·이미선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기가 끝나는 오는 4월 18일 전에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세한이 지나고 봄이 되면 우리는 누가 민주주의를 푸르게 지켰는지 알게 될 것이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고 했다. 반민주주의가 극에 달하면 다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로 돌아갈 것이다. 그게 역사의 법칙이다.
최현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