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회(1994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아버지의 이름으로’(짐 셰리던 감독)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제리 콘론), 피트 포스틀스웨이트(조세프 콘론) 등이 열연한 영화다. 1974년 10월 실제 발생한 영국 술집의 폭탄 테러 ‘제리 콘론 사건’을 영화한 것으로, 북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IRA 소행인 폭탄 테러 혐의로 입건돼 무려 징역 15년을 살다 무죄를 선고받는 내용이다. 아버지는 협박과 고문에 못 이긴 아들의 허위진술로 공범으로 지목돼 같이 교도소에 수감되지만, 아들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투쟁하다 옥중에서 사망한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와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실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이 권력의 뒷배로 쓰이다가 독이 될 때가 많다.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 씨는 문민정부 최고 실세로 군림하다 1997년 한보 사태 당시 몸통으로 지목받는 등 각종 비리 혐의에 연루돼 구속됐다. ‘홍삼 트리오’로 불린 김대중 전 대통령 세 아들(홍일 홍업 홍걸)은 모두 권력형 게이트로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했다.
미국 정치판에서는 대통령의 권력·지위 등을 자식 등과 나누는 ‘족벌(가족)주의’가 횡행한다. 한국과 달리 가족 역할을 유독 강조하는 정치 문화라고는 하나 특혜 정도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족벌주의 끝판왕으로, 1기 행정부에서는 물론 2기 때도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절대 반지’를 함께 끼고 있는 모양새다.
트럼프 1기 땐 딸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가 실권을 휘둘렀다면, 2기 행정부에선 장남 트럼프 주니어가 실세로 부상했다. 트럼프가 그린란드 병합 야욕을 드러내자 ‘공식 직책도 없는’ 장남이 그린란드로 날아가 점령군 마냥 시찰하고, 그의 약혼녀는 주 그리스 대사를 꿰찼다. 연방 상원의원 자리를 노리던 둘째 며느리는 폭스뉴스 주말 프로그램 진행을 맡는가 하면, 큰딸과 작은딸의 시아버지는 각각 주 프랑스 대사와 아랍 및 중동 문제 선임 고문으로 지명됐다. 큰딸의 시아버지(찰스 쿠슈너)는 과거 실형을 산 인물로, 트럼프는 1기 행정부에서 사돈에게 사면권을 행사했다.
한국에선 대통령 가족이 행정부 고위 관료 또는 대통령실에서 근무하거나, 전과가 있는 친인척을 사면시킨 뒤 정부 관료로 등용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에서 최고 권력자가 가족에 대한 임명과 사면 권한을 남용하는 데도 별다른 제재가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임은정 편집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