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봄과 꽃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하지만 여전히 찬 바람이 불기도 하는 때다. 아무리 봄이라도 향기와 온기만이 가득한 시절이 있으랴. 겨울이 혹독하게 추워도 봄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예상치 못한 찬 바람이나 서리가 내려도 얼음은 녹기 마련이고 훈풍은 불어오며 계절은 바뀐다. 그게 정해진 이치다.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려면 묵은 먼지를 쓸어내고 서랍을 비워야 한다. 우선 회사 서랍부터 열어보니 지난 부서에서 썼던 내 명함이 몇 박스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른 버릴 것들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명함은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버리기가 쉽지 않다. 개인 정보가 너무 많이 적혀 있어 싹 모아서 태워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깔끔해 전에는 캠핑을 가는 이에게 부탁해서 불쏘시개로 태워버렸다. 요즘은 부탁할 지인이 없어서 명함이 쌓였다. 처리할 마음이 났을 때 없애고 싶었다.
태우는 것 다음으로는 문서 세단기에 넣는 것처럼 조각내는 방법이 있다. 손으로 찢자니 코팅된 종이라 잘되지 않았다. 성질도 버리고 손가락까지 같이 아플 것 같아 가위를 들었다. 이름과 연락처를 잘 알아보지 못하게 그 부분부터 가위질한다. 싹둑싹둑 소리가 시원하다. 내 이름을 자르면서 내 안의 쓸모없는 부분을 없애는 것 같은 착각에 속이 시원해진다. 그전에는 나를 나타냈던 작은 종이가 가위질 몇 번에 조각난 쓰레기가 됐다.
참으로 간단하고 쉬운데 왜 진작 이렇게 못했을까. 그깟 종이가 뭐라고. 그 종이와 나를 지나치게 연결할 필요가 없었다. 종이가 나를 나로 규정해 주는 것이 아닌데 어리석게도 그런 줄 알고 살았다. 다른 이를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명함이 주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작은 정보고 나중에 누구였나 기억이 안 날 때 도와주는 메모일 뿐이다. 몇 년 전에 받은 명함 속 사람은 이미 그 자리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랍 속 묵은 내 명함을 손가락이 아픈지도 모르고 모조리 잘랐다. 가위 손잡이에 눌린 손가락에 빨간 자국이 생길 정도였다. 쓰레기통에 종이 쪼가리가 가득하다. 웃음이 났다. 이래서 버려야 한다고 하는구나. 허전해진 서랍도 시원해 보였다. 의미 있다고 생각한 걸로 채웠던 곳에 공간이 생겼다. 숨 쉴 자리가 생긴 것 같아 영 시원했다.
정리정돈의 기본은 우선 버리는 것부터 라더니 그 말이 맞았다. 전에 대학 때부터 입던 옷도 버리지 못해 가득 걸려있던 행어가 무너진 일이 생각났다. 자려고 누웠는데 옷방에서 갑자기 뭐가 다 무너지고 쏟아지는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혼자 집에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난 소음에 무서운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한 손엔 휴대전화를 쥐고 한 손으로 조심스레 옷방 문을 열었더니 안이 엉망진창이었다.
2단으로 만들어진 철제 행어 가운데가 뚝 부러져 아래에 걸린 옷까지 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내 참. 옷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조립식 행어가 무너진건지. 결국 오래된 옷을 다 솎아내 버려야 했다. 혼자서 치우는 건 엄두가 안 났지만 그래도 수습은 해야 하니 늦게까지 못 자고 옷 먼지에 콜록대며 버릴 옷을 꺼냈다. 뒤지다 보니 이건 뭐 일 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한 옷에 이건 무슨 생각으로 산 걸까 하는 옷, 대학 때부터 입어서 무척 좋아했지만 소매 끝이 나달나달해진 옷이 그득했다. 버릴 것만 따로 쌓아도 허리 높이가 넘었다. 옷을 좋아해서 많이 사기도 했지만 적절한 때 버리지 못해서 일어난 난리였다.
전에 정리전문가를 만나 들은 말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뭐든 하나를 사고 싶으면 집에 있는 걸 하나 버려야 합니다. 공간은 한정적이니까요. 물건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자기 자리를 찾으면 정리정돈이 힘들지 않아요”. 현대인은 너무 많은 물건 속에서 산다고들 한다. 지금부터라도 미적거리지 않고 현명하게 버리고 버려서 알갱이만 가질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생겼으면 좋겠다.
최영지 독자여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