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전략’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비합리적이고 모험적인 인물로 인식되도록 유도하는 국제정치학 용어다. 1969년 백악관에 입성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외교 전략에서 유래됐다. 베트남전 종전을 희망한 닉슨 대통령이 “모스크바에 핵을 투하하겠다”고 공언하자 세계는 그를 “미쳤다”고 했다. 베트남 전쟁에 러시아(옛 소련) 개입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닉슨 대통령 이후 이런 광인전략을 자주 쓰는 인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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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플로리다주에서 워싱턴DC로 향하는 에어포스원(대통령 전용기)에서 기자들에게 무역 상대국에 대한 상호관세가 자동차 관세와 함께 부과될 것이라고 말했다.로이터연합뉴스 |
닉슨이 미국과 등을 진 적대국에만 이 전략을 쓴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에도 으름장을 놓으며 협박을 일삼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2기 출범 이후 국제질서에 거대한 파고가 일고 있는 것이다. 미국 국익을 최우선하는 수준을 넘어, 미국이 2차 대전 이후 형성한 동맹 시스템과 자유무역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불법이민과 마약 문제를 핑계로 중국 멕시코 캐나다를 상대로 관세 포문을 연 데 이어 이달 12일에는 미국으로 수입되는 철강·알루미늄에 25% 관세를 부과했다. 다음 달 2일부터는 국가별 관세뿐만 아니라 비관세장벽까지 손보겠다며 ‘상호관세’ 카드를 내밀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오락가락 관세 정책은 세계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는 지난 1월 20일 취임 직후 “2월 4일부터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가 발효 하루 전 이를 한 달간 전격 유예했다. 또 지난 5일 멕시코와 캐나다에 각각 25% 관세를 부과한 지 하루 만에 자동차 및 관련 부품에 대한 관세를 1개월간 면제했다. 하루 뒤엔 추가로 미국·멕시코·캐나다 무역협정(USMCA) 적용 품목까지 면제 범위를 확대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작한 관세 전쟁에 상대국들도 순순히 당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철강 알루미늄 관세 부과에 유럽은 보복 조처로 다음 달 1일부터 미국산 위스키에 50%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가만있을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다. 그는 “유럽산 와인 샴페인에 2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미국산 제품 불매 운동이 거세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라”고 조롱한 캐나다 카페에서는 ‘아메리카노’ 대신 ‘캐나디아노’라고 바꿔 부를 정도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외정책에서도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TV로 전 세계에 생중계된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 공개 설전은 충격적이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안전 보장을 강조하자, 미 대통령과 부통령은 “무례하다”며 몰아세웠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푸틴 대통령 편을 드는 모습은 국제 사회를 불안하게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맹국과 함께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주도해온 ‘세계경찰’ 미국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사건이다. ‘우크라이나의 굴욕’은 전 세계에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걱정을 안겼다. 힘이 없으면 국격을 세울 수 없고, 국익 앞에선 동맹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명확하다.
전 세계가 관세 전쟁과 미국 우선주의에 서둘러 대응책을 내놓고 있으나 우리는 국정 리더십 부재로 무방비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일 집권 2기 첫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한국의 관세는 4배나 높다”고 밝혔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대부분 상품을 무관세로 교역하는 상황에서 ‘4배 관세’는 엉터리 주장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미 대선 기간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은 현금 인출기”라고 했던 발언을 보면 앞으로 미국이 내밀 청구서 무게를 가늠할 수 있다. 다음 달 상호관세 부과 전 이를 바로잡고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해야 하는 데 여야는 정쟁만 벌여 안타깝다.
지난 1월 생산·소비·투자 지표 모두 전월 대비 마이너스인 ‘트리플 감소’를 겪으며 우리 경제 하방 위험이 크다. 한국은행은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1.9%에서 1.5%로 하향 조정했다. 여야는 민생을 살리겠다며 국정협의회를 세 차례 열었으나 성과가 없다. 이후 국민연금 개혁은 큰 틀에서 합의되고 있으나 추가경정예산 편성은 하세월이다.
대내외 엄중한 상황에서도 정치권 갈등은 격화될 듯하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정치권은 정쟁의 소용돌이에 빠질 게 뻔하다. 정치권이 헌재 결정에 승복하지 않는다면 국민 통합과 화합은 어렵다. 더 독해진 ‘미국 우선주의’의 거친 파고가 밀려온다. 집안싸움을 하더라도 외부의 적이 나타나면 일단 힘을 합쳐 맞서야 마땅하지 않나.
이은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