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 제주 도동리 어촌 계장 선거에 나선 부상길이 경쟁자로 출마한 오애순에 대한 비방을 일삼자 한 촌부가 이 같은 촌철살인을 던진다. 반면 “계원들도 상길이의 실체를 알 권리가 있는 법이라고. 너도 선을 넘어”라며 부추기는 주변인들의 권유에도 애순은 “나는 공약으로 승부해”라고 응수한다. ‘비누도 안 돌리고, 돼지도 안 먹이는’ 신사적인 방법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조기대선 국면에서 정치권도, 유권자도 새겨야 할 장면이다. 물론 여주인공 애순처럼 공약으로만 승부한다는 것도 드라마이기에 가능하겠다. 그럼에도 ‘공약은 없는지’라는 핀잔에는 ‘비방보다는 공약에 더 집중하라’ ‘차악의 선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보통 사람들의 민심이 담겼다.
‘이재명은 안된다.’
15룡까지 거론됐던 국민의힘 잠룡 모두 ‘이재명 불가론’을 앞세웠다. 그 중심에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에 대한 범죄자 프레임이 깔렸다. 민주당은 12·3 계엄사태 이후 탄핵정국을 겪으면서 조기대선을 위해 몸을 풀어왔다. 반면 국민의힘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전까지는 조기대선이란 단어 자체를 금기어로 삼았다. ‘어대명’이란 말이 ‘어차피 대통령 후보는 이재명’으로도 풀이되지만 때로는 ‘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으로까지 확대되는 상황이니, 이 전 대표에게 집중 포화가 쏟아지는 사정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당 후보로 이 전 대표가 아닌 다른 인물이 나선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 전 대표를 비방하던 이들은 어떤 점을 자신의 경쟁력으로 부각할 셈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 속 대사처럼, 당신들 본연의 공약은 없는가.
물론 각당 경선이 진행되면서 후보마다 구체적인 공약을 속속 발표할 것이다. 하지만 대선은 물론이고 총선, 지방선거 등 각종 선거 때 마다 네거티브 선거전을 경험한 바, 이번 조기대선도 공약보다는 네거티브 선거전이 될 공산이 크다. 그 전조가 국민의힘에 자리잡은 이재명 불가론이다.
국민의힘 주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이런 전략은 이재명 전 대표를 싫어하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살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민주당에 등을 돌린 유권자들이 국민의힘을 선택할 것인지가 문제다. 무조건 이 전 대표에 대한 반감을 심는 것만으로 대선에서 승리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른바 ‘킬러 공약’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재명은 안된다? 그래서 어쩌라고?”식의 역풍만 맞을 수 있다. 이 전 대표 지지율이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무당층, 중도층 비중이 만만찮기 때문이란 것을 감안하면 국민의힘으로서도 제대로 된 정책과 비전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지난 대선에서 상호 비방전 속 최악의 ‘혐오 선거’를 치른 바 있다. 국민들이 차악의 후보를 선출하고, 새로 출범한 정부 역시 강 대 강 대결을 이어오면서 국민들의 정치 혐오와 무관심만 커졌다.
이번 조기대선에선 각 후보마다 네거티브를 지양하고 정책 선거를 치러야 한다. 시간에 쫓겨 치르는 대선인데다 차기 정부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없이 출범해야 한다. 이에 보수나 진보 진영 대권주자는 각각 국민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엄중한 마음으로 출마를 결심하고 공약도 차근차근 쌓아가기 바란다.
네거티브 선거는 혼탁 선거로 이어진다. 각 정당은 선거 마다 상대 당을 비판하며 ‘청산’을 외치지만 역대 정권의 청산은 전임 정부에 대한 인적 청산에만 치중됐다. 다르게 표현하면 정치 보복이다. 집권 정당이 바뀔 때마다 정치 청산이 최대 화두로 부각하지만 새 정권도 후임 정권에게는 척결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을 충분히 경험했다.
이에 집권을 하더라도 전임 정부 탓에만 매몰돼 미래 비전 제시를 등한시 하지 말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만 하다가 보수에 정권을 넘겼다고 비판받았다. 윤석열 정부는 집권 3년 차에 들어서도 전 정부 탓을 하며 국가채무가 늘어나 일하기 힘들게 됐다고만 했다.
사족. ‘폭싹 속았수다’ 속 어촌계장 선거는 당시의 정치판을 옮겨 놓았다. 담배 한 보루를 끄집어내며 한 노인이 “오가(오애순)가 암만 야무지고 부가(부상길)가 암만 모자라도. 여자 계장? 조선팔도에 없다”고 말한다.
담배를 돌리거나 도새기쇼야키(돼지양념구이)와 국수를 대접해 표심을 사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후보에게 적대적이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후보와 공약에 대한 검증도 없이 ‘아무리 모자라도’ 한 표를 행사하는 식의 묻지마 투표는 없어야 한다.
김태경 서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