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는 기원전 54년부터 국가 통치의 원리를 다룬 책을 쓰기 시작한다. 국가를 다룬 책이지만 키케로의 책은 플라톤의 ‘국가(pliteia)’와 달랐다. 플라톤이 제시한 국가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 없는, 다만 이론적이고 이상적일 뿐 현실에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이데아였다. 반면 키케로의 ‘치국론(de re publica)’은 이상국가의 현실적 모범이라 할 역사적 실례를 다룬다. 그건 바로 더없이 훌륭한 정치제도로 500년 가까이 입증된 로마 공화정이었다.
로마건국신화에 따르면 트로이아 유민들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열망으로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를 찾아왔다. 그들은 강을 타고 올라가 하구에서 멀리 떨어진 상류의 강가에 도읍지를 정했다. 바다를 통해 소리 소문 없이 기습적으로 쳐들어오는 적들로부터 도시를 보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 도시에서 생산된 잉여 물산을 수출하고 부족한 물자를 밖에서 수입하는 데 유리한 곳이기도 했다. 나아가 흔히 아름다운 바닷가 경치에 취하고 바다를 통한 장사와 항해에 마음을 빼앗겨 늘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잦은 문화 왕래로 조상의 관습과 제도가 쉽게 변하고 타락하는 해안도시들과 달리 바닷가를 피한 로마는 말하자면 관습과 제도가 파도에 휩쓸려 표류할 위험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처음에 로마는 왕정이었다. 하지만 여느 왕정과 달리 종신직의 왕은 시민의 동의를 받아 즉위했고 시민은 왕을 혈통이 아니라 지혜와 덕을 갖춘 인물을 톺아 추대했다. 시민의 동의 없이 그저 혈통만으로 즉위한 왕이나, 혈통에 따른 왕을 몰아내고 권력을 찬탈하여 스스로를 왕이라고 주장한 참주만을 보아온 그리스인들에게는 일찌기 없었던 일이었다. 그렇게 추대된 로마의 왕은 시민의 지혜를 모을 기구를 창설하였는데, 나중에 원로원이라고 불리는 귀족들의 회합이었다. 왕은 시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나누어 줬고 다만 다수의 횡포로 국가적 위기가 초래되지 않도록 투표권을 교묘하게 분할하기도 했다.
또한 로마의 왕은 시민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농업을 장려함으로써 약탈과 노획이 아닌 평화와 공존의 정의와 신의로써 모두가 온갖 이득의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시민을 가르쳤다. 이에 시민의 마음에 평화롭고 화합된 국가를 열망하는 온유가 확립되었다. 그래서 로마는 전쟁을 하면서도 정의와 법을 지켰고 전쟁 행위에 일체의 불의와 불경이 끼어들지 못하게 했다.
마침내 로마 시민은 왕의 가족이 저지른 악행을 목격했을 때 왕정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왕정을 폐지했다. 로마는 왕을 축출하고 왕을 대신할 최고 통치자로 집정관을 두기로 결정했다. 권한이 대폭 축소된 통치자였고 임기는 1년으로 단축됐다. 종신직 왕의 권력을 임기 제한으로 견제한 것도 모자라, 독재의 위험성을 방지할 목적으로 매년 2명의 통치자를 뽑아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 왕을 없앰으로써 인민의 자유는 보장되었고, 지혜롭고 정의로운 통치자를 얻을 기회는 확대되었다. 그리고 통치자의 판결과 처벌은 인민의 상소를 통해 견제받았다.
소수 귀족들의 전횡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할 자애로운 통치자의 역할을 집정관을 두어 유지했고, 대중의 어리석은 판단과 무모한 방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할 지혜를 모을 귀족들의 원로원을 보존했고, 일인 혹은 소수의 독재를 막기 위해 인민의 투표와 선택으로 법을 제정하고 관료를 선출함으로써 인민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리하여 통치자는 충분한 권한을 갖고, 지혜로운 귀족들은 충분한 권위를 유지하고, 인민은 충분한 자유를 확보했으며, 각자의 권리와 의무와 직분이 공평하게 균형을 이룬 국가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로마는 왕정과 귀족정과 민주정의 장점만을 뽑아 새로운 종류의 혼합정을 창출했다. 이것이 이름하여 공화정이다.
그런데 역사가 500년 이상 쌓인 로마 공화정도 위기에 빠진다. 독재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두 번째로 등장한 독재자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 무장 병력을 이끌고 수도 로마를 침탈한다. 그는 영구 독재관을 꿈꾸고 있었다. 가만히 있을 로마 시민이 아니었다. 공화정의 첫걸음을 내딛었던 조상을 본받아 브루투스가 다시 한번 공화정을 위한 칼을 들어 독재자를 처단했다. 누리던 자유를 박탈당했을 때 자유의 칼날은 더욱 잔혹한 법이다. 독재자의 권력이 법을 익사시키고 자유를 공포로 질식시킬지라도 법과 자유는 언젠가 다시 살아난다.
이탈리아를 향하던 배는 폭풍에 밀려 급하게 뭍으로 뱃머리를 돌렸고 바닷가에 내려 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한다. 안도와 휴식의 포도주를 마신다. 지도자는 시민을 위로하며 말한다. 용기를 내라. 내일은 더 큰 파도를 타리라. 우리는 오늘보다 더 큰 위기의 격랑과 맞닥뜨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격랑의 높은 파도 위에서 우리는 멀리 앞날을 내다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