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년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또 2040년에는? 장밋빛 예견보다는 여러 두려움이 밀려온다. 왜 희망이나 번영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왜 후손들이 행복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선뜻 생기지 않을까. 이것은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화로 인한 자연 질서의 파괴, 감당하기에 가혹한 재해와 재난들, 축복이라 착각했던 문명 이기로부터의 공격, 생사기로에 선 사람들의 불안정한 삶 등 당혹스러운 난제들 앞에 서 있기 때문이리라.
18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큰 오류를 낳게 했다. 지구환경에 대해 사용하면 할수록 고갈된다는 자원의 관점이 아닌,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경제성장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는 공간의 관점이 ‘그것’이었다. 인류는 이렇게 산업화로 획득된 힘을 주체하지 못해 전쟁을 일으켰고, 왕조시대 발상으로 독재 권력을 누렸고, 오직 돈을 목적으로 한 성장의 과시욕에 빠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산업화는 성장이란 이름으로 인류를 욕망과 탐욕으로 얼룩지게 했고, 불안한 지구와 두려움에 찬 우리 현실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희망은 있다. 희망의 원천은 인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등장한 ‘인간의 지혜’다. 인류사 가운데 위기 극복을 위해 인간의 지혜가 빛을 발한 때가 자주 있었다. 가장 강력했던 순간은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한 폐해 극복 과정’이라 생각된다. 발명된 기계와 농촌에서 유입된 값싼 노동력을 기반으로 형성된 산업 구조는 도시화를 가속 시켰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의 결과는 처참했다. 난립한 공장들이 내뿜는 오염물질로 인한 공해 확산, 몰려든 노동자들의 주택 부족과 주거환경의 질적 저하, 물과 쓰레기 등과 관련된 위생 문제, 극심해지는 빈부 격차, 노동 계층의 생존과 관련된 불안감 증대, 뒷골목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빈민과 아이들 등. 이전에 경험치 못한 현실 문제 앞에서 모두가 난감해할 때 세 가지 양상이 등장했다. 드러난 문제들을 부정하고 거부한 공산주의(현실 거부), 도시 탈출을 시도한 유토피아 운동(현실 도피), 그리고 맞닥뜨린 문제들에 대응한 개혁 운동(현실 수정)이었다.
얘기하려는 인간의 지혜는 현실 도피 즉, 오염된 도시에서 벗어나 이상주의적 산업공동체를 영위하며 탁아소 유치원 협동조합 등의 복지후생 개념을 탄생시켰던 오언(Robert Owen)의 도전에서 시작된다. 채드윅(Edwin H Chadwick)은 도시 속 노동자에 집중했다. 짙은 석탄 연기로 햇빛조차 들지 않던 습기 찬 집에서 곰팡이와 사투를 벌이며 피부병과 폐병으로 쓰러지던 노동자의 삶에 가슴 아파한 그는 1834년 노동자의 주거수준 향상을 위한 최초 법률 구민법(the Poor Act)을 제정하며 공중위생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이 법은 상·하수도 건설과 일조권 개념 도입 등으로 이어지며 전 세계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의 기원을 이루었다. 급격한 도시화의 가장 큰 난맥은 집의 부재였다. 유일한 해결책은 싼 주택의 대량 공급이었고, 이는 집합주택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또 숨과 쉼을 위한 공원 같은 발명품도 이때 탄생했다. 몇 사례만으로도 현실 수정을 위해 창의적으로 빛났던 인간의 지혜를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를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니 두 가지 질문에 이르게 된다. 하나는 생존 문제가 점차 악화할 것으로 예견되는 21세기에 인류는, 아니 우리는 무엇에 집중해야 하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19세기와 같이 상황 극복을 위해 누가 도전하고 실험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150여 년 전, 인간의 지혜는 온전히 ‘노동자의 삶 개선’에 집중했다. 왜 노동자였을까? 산업혁명의 폐해에 가장 직접으로 노출된 피해자가 그들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논리는 21세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의 지혜는 형평성 잃은 도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약자들과 기후 변화로 인한 재해와 인재로 인식되는 갖가지 재난에 노출되었거나 노출될 수 있는 사람들에 집중되어야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관점이다.
19세기에는 시대 아픔을 고민하며 그 속으로 뛰어든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산업혁명의 후유증 해결에 인생을 걸었다. 그 결과, 100%는 아니었지만 인류 문명 발전에 시금석을 놓았다. 21세기! 우리의 선각자는 누구일까? 시대가 복잡해지고 다변화되는 것만큼 선각자의 개념도 바뀌고 있다. 절대 권력에서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로, 관이라는 집단으로, 또 시민으로, 이제는 시민을 넘어 국민으로 이행 중이다. 이 논리대로 라면 21세기의 시대 문제를 끌어안아야 할 선각자는 ‘바로 국민’이라 할 수 있다.
예견치 못한 난맥과 난항의 길을 걷고 있는 21세기의 우리 처지가 참으로 애처롭다. 외견상 풍부함과 화려함으로 치장된 듯하지만, 속으로 곪은 환부들은 급격히 늘어나고 또 깊어 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19세기와는 다른 절체절명의 생존 문제 앞에 서 있다. 경제를 넘어 생명의 문제다. 나와 가족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다. 지금 당장이기보다는 미래세대의 문제다. 지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제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위기마다 등장한 ‘인간의 지혜’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