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레 선거철이면 신조어가 쏟아지기 마련이다. 이번 대선도 예외는 아니다. ‘구대명(90% 지지율 대통령 후보 이재명)’ ‘꼿꼿 문수(한덕수 단일화를 거부한 김문수)’ ‘하하연대(하버드 동문 이준석과 한덕수 단일화)’ 등. 대선판 양상을 재밌게 잡아챈 말이다. 좀 차원이 다른 신조어도 있다. ‘삼권귀일(三權歸一)’.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이 대통령 1인에 귀속된다는 뜻이다. 이미 입법권을 쥔 민주당 승리 때 나타날 현상으로 제기됐다. 이른바 ‘이재명 포비아(공포증)’를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해도 사법까지 장악한다고? 어폐가 있는 것 아닐까.” 이런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적잖을 것 같다.
요즘 국회, 정확히 민주당의 사법부 공격을 보면 말이다. 지난 14일 예정됐던 사상 초유의 대법원장과 대법관 국회 청문회는 사실상 무산됐다. 대법원이 “여러모로 곤란하다”며 불참한 것. 발끈한 법사위는 특검법, 법원조직법, 헌법재판소법을 일괄 상정, 법안 소위로 넘겼다. 이날은 대통령 공식 선거운동 사흘째 되는 날. 무엇보다 법안 하나하나가 대법원 위상과 역할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이번 청문회 목적은 ‘사법부의 대선 개입 의혹 진상규명’. 지난 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 선거법 위반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무죄 원심을 뒤엎고 유죄 취지로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 것. 만약 6월 3일 선거일 전 벌금 100만 원 이상 형량이 최종 선고되면 후보 자격은 날아간다. 서울고법에서 피선거권 박탈형만 나와도 ‘대통령 무자격자’로 낙인찍히는 셈. 민주당은 즉각 반발했다. “대법원이 정치를 하고 나섰다”, “설익은 법리로 국민주권을 침해했다”, “법원 쿠데타” 등. 이어 사법부를 향한 총공세가 시작됐다. 대법원장에 대한 특검뿐만 아니라 대법원 위상을 축소하는 법안이 쏟아졌다. 국민의힘 등 여기저기서 “사법부 길들이기”라는 강한 비판이 나왔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언론 기고에서 삼권분립이 삼권귀일 될 걸 우려했다. “민주주의는 권력 간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이 무너지면 붕괴한다.”
반면 대법원의 자업자득이란 반론도 만만찮다. 당장 법원 내에서 비난 목소리가 속출했다. 사법부 중립성 훼손을 이유로 “대법원장 물러나라”는 말까지 나왔다. 판사들이 가장 문제 삼은 대목은 속도였다. 이번 상고심은 대법원 접수 34일, 전합 회부 9일 만에 나왔다. 전례가 없는 속전속결. “대법관들 상호 간의 설득과 숙고의 성숙 기간을 거치지 않은 결론은 외관상의 공정성에 대한 시비도 문제이지만 결론에서도 당사자들과 국민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할 수 있다.” 전합 결론에 반대한 2명의 대법관 말처럼 사법 신뢰는 크게 훼손됐다. 전국법관대표회의도 임시회의를 소집, 대책 마련에 나섰다. 민주당이 정치적 반격과 함께 법적 대응에 나선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당장 대선 기간 중 이 후보 관련, 모든 재판 일정 중지를 요청했다. 결국 법원이 수용했다. 아울러 대통령 임기 중 재판중지 입법, 해당 선거법 혐의 면소(免訴)를 위한 개정안도 마련키로 했다. 논란이 있긴 하나 여기까진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법원장 등에 대한 청문회와 특검, 나아가 대법원 위상 격하를 겨냥한 입법은 지나쳤다.
이날 청문회를 보이콧했지만, 대법원은 이미 저잣거리의 우스개가 돼 버렸다. 덩달아 사법부 독립과 권력 분립이란 헌법 가치도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우리와 비슷한 헌법 구조를 가진 미국. 법관의 의회 출석은 전례 없는 일이다. 과거 이승만 대통령은 법원 판결에 공개 불만을 드러낸 적 있다. 당시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는 이렇게 일갈했다.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 언감생심, 조희대 대법원장을 가인에 비교할 생각은 없다. 다만 망신주기식 접근보단 제도적 보완에 주력하는 게 나았다. 그래야 문제를 제대로 개선할 수 있다. 물론 민주당도 대안을 내놓긴 했다. 이날 상정된 대법관 수 증원 법안이다. 현재 14명에서 30~100명까지의 확대안이다. 누가 봐도, 이번 사태에 놀란 민주당이 대법원을 확실한 자기편 만들려는 계획이다. 집권이 유력한 만큼 늘어난 대법관을 자기 입맛에 맞는 판사들로 충원할 수 있다.
사실 대법관 증원은 오랜 논란거리였다. 폭증하는 상고심 건수로 대법원 재판은 ‘10초 재판’으로 불리며 부실 우려를 키워온 상태. 무턱대고 대법관을 늘릴 수만도 없다. 전합에서 제대로 된 토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처럼 ‘상고 허가제’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만만찮았다. 그렇게 되면 상당수 사건은 3심에 올라가지 못한다. 사실상 ‘2심제’다. ‘상고 법원’을 따로 두자는 주장도 있다. 이 경우엔 상고 법원에 불복한 사건은 결국 대법원으로 가야 한다. ‘4심제’가 된다는 말이다. 이날 함께 상정된 재판 소원 허용 법안도 마찬가지. 대법원 결정 불복을 허락해 헌법재판소가 최종 선고하면 이 역시 4심제. 정말 진지한 토론과 숙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결코 속도전으로 밀어붙일 문제가 아니다. 법원 농단에서 국민주권도 지켜야 한다. 그렇다고 선무당 사람 잡듯, 사법부 잡도리는 곤란하다. 삼권분립이 삼권귀일이 되는 교각살우(矯角殺牛)다. 민주주의를 죽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