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문화비평가 에밀리 부틀은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라는 책에서 현대사회의 진정성이 하나의 도덕적 규범이자 마케팅 요소로 변질됐다는 통찰을 전한다. 그의 말처럼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진정성이 넘쳐흐르고 있다. 감성적인 슬로건과 진심 어린 표정, 울먹이는 목소리. 모든 후보가 자신이 가장 진정성을 갖춘 후보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연출한 ‘진정성 있는 모습’은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를 극적으로 재현한 것일 뿐이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지만, 가시적인 변화를 만들어 낼 기회는 많지 않다. 4년 혹은 5년. 여러 계절을 보내야만 겨우 행사할 수 있는 소중한 한 표가 생긴다. 이 소중한 한 표에 나의 지지를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정치인의 진심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진정성을 말로 판별하는 것은 어렵다. 정치적 수사는 화려한 만큼, 구체성과 현실감이 부족하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는 한계에 부딪힌 실제 시민의 삶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이 필요할까. 정치가 모호하다면 정책은 분명하다. 정책은 숫자와 그래프로, 계획과 실행 여부를 명확히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확신을 외칠 때, 정책은 가장 확실한 변화를 시작한다.

선명한 정책보다 진정성을 강조하는 정치의 풍토는 시민의 태도에도 영향을 준다. 시민 각자가 자기 진정성을 확신할수록 상대를 비판하고 배제하는 태도가 강해진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의 진정성은 맹목적으로 믿으면서, 상대 후보의 진정성에는 냉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결국,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시민 간의 극단적 배제와 공격이 강화되는 것이다.

정치가 정책을 외면할 때 가려지는 이들이 있다. 진정성의 연출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는 이들, 사회구조의 피해자들이다. 5월 내내 다양한 시민을 만났다. 문화다양성 주간을 맞아 자신의 예술성을 뽐내는 장애 시민,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을 위해 시민 연대 서명을 요청했던 부산의 피해자들이다. 한 청년 정치인이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부조리라고 비평하며 진정성을 의심할 때, 이들은 고작 30분의 회의 참여를 위해 두리발(교통 약자를 위한 특별 교통 수단)을 예약하고 1시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렸다. 저상 버스의 가장 큰 걸림돌은 시스템도, 배차 시간도 아닌 동료 시민의 시선이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동이 권리임을 외쳤지만, 수많은 선거철의 약속은 정책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부산 전세사기 피해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더욱 참담하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극심한 경제적 압박 속에서 같은 피해자끼리 법적 투쟁에 나서야 하는 가혹한 상황에 놓여 있다. 많은 피해자가 개인회생을 신청할 만큼 극도의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정책은 더디게 나아가고 있다. 이 외에도 청년 노동, 교육, 지역 불평등과 같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여전히 정치 담론 뒤에 가려져 있다. 당장의 언어보다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선택했던 지난 걸음이다. 진정성 있는 정치인이란 좋은 말로 공감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약속한 정책을 끝까지 이행하는 사람일 것이다.

정책의 구체성이야말로 정치인의 진정성을 가늠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기준이다. 우리 사회의 진정성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정성의 포장지를 벗겨내고 실질적 내용을 들여다보는 시민적 성숙함이다. 당장의 언어에 매몰되지 않고, 오늘 이 순간 우리 곁에 있는 현실적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선거를 앞둔 시민의 민주주의, 민주시민의 제대로 된 진정성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 선출이 머지 않았다. 선거 기간 동안 외쳤던 변화의 의지가 실제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는지, 소외된 시민을 위한 공약이 예산과 인력을 동반한 실질적 정책으로 구현되는지 지켜봐야 한다. 투표는 민주주의의 시작점이지 종착점이 아니다. 새로운 정부의 정책 실행 과정을 감시하고, 공약 이행을 점검하며, 필요할 때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 결국 진정성 있는 정치는 진정성 있는 시민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