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 협상 세부 협의를 위해 미국을 찾았던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4일 별다른 진전 없이 귀국했다. 김 장관은 미국 뉴욕에서 12일(현지시간)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과 3500억달러(486조 원) 규모 대미 투자의 구체적인 이행 방안과 관련해 논의했다. 대미 투자협력 펀드 구성이나 운용 방식 등에 대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현지에서 한미 관세협상 관련 후속 협의를 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4일 오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미 관세 후속협상 교착은 이미 예견된 바 있다. 앞서 러트닉 상무 장관은 11일 “관세를 내든지, 아니면 합의를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하라”고 밝혔다.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를 미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행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으면, 한미가 합의했던 상호·품목 관세율 15%를 4월 초 미국이 정한 25%로 되돌려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일본이 무역협정에 서명했다는 점을 거론하며 “유연함은 없다”고 했다. 최근 일본은 5500억 달러(764조 원) 대미 투자 패키지에 합의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투자처를 정하면 일본이 45일 내 자금을 댄다. 투자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 마쳐야 한다. 투자금이 모두 상환되기 전까지는 양국이 수익을 절반씩 나누지만 투자금 상환이 끝나면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투자가 아니라 약탈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 정부가 일본과 같은 조건으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에 합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을 일본과 비슷한 경제 규모라고 보는 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다. 일본 국내총생산(GDP·4조1864억 달러)은 한국(1조7903억 달러)의 2배가 넘고, 외환보유액은 일본이 1조3242억 달러로 4163억 달러인 한국의 3.2배다. 더욱이 일본은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맺은 데다 준기축 통화국이다. 트럼프 정부가 투자를 요구하는 3500억 달러는 한국 외환보유액의 84%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미국 요구대로 한다면 한국 외환시장 붕괴는 물론 달러화 고갈로 인한 외환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면 합의, 국익에 반하는 결정, 합리성·공정성을 벗어난 협상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밝히면서 “앞으로 한참 더 협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세 협상이 지연되면 상호관세가 25%로 원상 복구돼 자동차 철강 등 산업계 피해로 직결된다. 그렇다고 일본처럼 일방적으로 불리한 합의가 이뤄져서는 안 된다. 가뜩이나 미국 내 한국 근로자 구금 사태로 비자 문제가 불거지면서 미국을 향한 국내 여론이 부정적이다. 이런 상황은 미국 요구에 대응할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또한 미 정부에 한일 간 경제규모 차이를 설득하고 국익을 지키는 실용 외교를 펼쳐야 마땅하다. 조선업 원자력 반도체 등 미국이 약한 분야의 산업 협력을 구체적으로 설정해 미국과 협상해야 한다는 전문가 조언도 새겨들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