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거짓말’은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다. 영국 리얼리즘 영화를 대표하는 마이크 리 감독 작품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개막작의 무게감보다 큰 충격은 야외 스크린이었다. 스위스에서 빌려온 이 스크린이 영화 상영을 위해 펼쳐지며 ‘영화의 바다’가 열렸다. 1996년 9월 13일 부산 수영만요트경기장 야외무대에서 관객 5000여 명이 지켜봤다.
이때 영화제 프로그램 안내책자엔 조직위원장인 문정수 당시 부산시장과 김동호 집행위원장 인사말이 실렸다. 키워드는 ‘미래와 축제’ ‘꿈’이다. 김 위원장은 ‘비경쟁·아시아·한국영화’로 영화제 특징을 정리했다. 지금 영문 약칭 BIFF(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가 당시엔 PIFF였다. 부산을 BUSAN이 아니라 PUSAN으로 표기하던 때였다.
‘작지만 권위 있는 영화제’란 꿈은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 자리매김했고, 부산은 BIFF 전용관 ‘영화의전당’을 가진 유네스코 영화창의도시가 됐다. 영화가 미래를 꿈꾸는 예술이라면 여기서 만족할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영화 회사가 만들어지고, 영화 초창기를 이끈 나운규의 첫 활동 무대인 부산이다. 우리나라 첫 국제영화제로 영화의 바다 항해를 시작할 수 있었던 데는 많은 영화인 및 시민의 노력과 함께 이런 역사적 토양도 한몫한다. 이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때다. 영화 생태계가 변하고 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때문에 신작이 줄고, 영화관이 죽을 쑨다.
새로운 도전은 출발선을 되짚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성큼성큼 걸어온 발걸음 사이 흐트러진 발자국에 답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며 검열을 이겨내고, 조직 내부의 동맥경화와 잡음을 씻어내는 힘이 도전의 바탕이다. ‘BIFF의 정신’ 고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 겸 부집행위원장이 고민하던 ‘테세우스의 배’란 화두는 지금도 유효하다. 고대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를 기리고자 기념물로 남긴 배를 수리하면 과연 이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느냐는 숙제다. BIFF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란 질문이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17일 시작된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개막작으로 내걸고 26일까지 영화의 바다를 항해한다. 비경쟁 영화제라는 틀을 깨고 경쟁 부문을 신설했다. 아시아 작품 14편이 다투는 ‘부산 어워드’는 도전을 평가하는 가늠자다. ‘영화로 아시아를 하나로 만들기’는 여전히 도전할 가치가 있는 꿈이다.
정상도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