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헬무트 콜 전 서독 총리를 언급하며 보수 정권은 이전 정부의 공든 탑을 허물고 진보 정권만이 교류협력의 기반을 닦는 것처럼 비판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특정 정파의 교류정책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아데나워, 브란트, 슈미트, 콜 등 서독 지도자 모두는 정파를 넘어 안보·동맹·억지력을 기반으로 동서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아데나워는 나토 가입과 서방 통합을 통해 서독의 독립을 보장했다. 그는 서독이 다시는 독일 제국 시절처럼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철저히 서방 편에 서는 노선을 선택했다. 나토(NATO)에 가입하고,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및 이후 유럽경제공동체(EEC)의 창설을 주도함으로써 서독은 서유럽 민주 진영 속에서 소련의 위협을 견딜 수 있는 안전을 확보했다.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에 이후 독일이 동구권과 교류를 확대할 수 있는 안전판이 마련됐다.
브란트의 동방정책 역시 ‘두 독일은 외국이 아니다’는 원칙을 세우면서도 나토와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유지했다. 그는 동독과의 현실적 교류를 통해 긴장을 완화했지만, 동시에 서독의 정체성과 서방 동맹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측근인 기욤이 동독의 스파이로 드러난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결국 브란트는 사임했고, 독일 사회는 “대화와 교류가 필요하되, 국가안보와 정보역량 없이는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슈미트는 현실적인 접근을 택했다. 그는 소련이 서유럽을 직접 겨냥한 SS-20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자, 이를 유럽 안보의 근본적 위협으로 규정했다. 슈미트는 서방 정치 지도자 중 가장 먼저 이 문제를 지적하며, 나토의 ‘이중 트랙’ 결정을 주도했다. 즉, 미국의 퍼싱-2 미사일과 그리폰 순항미사일을 서독에 배치하는 동시에, 소련과 군비통제 협상을 병행한다는 전략이었다. 미사일 배치로 억지력을 확보하면서도 협상으로 긴장을 완화하려 한 것이다. 독일에서는 대규모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녹색당이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지만 결국 독일 연방의회 다수가 1983년 11월 이를 승인했다. 1983년 12월부터 신형 핵미사일이 서독에 배치됐고, 이는 훗날 1987년 미소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콜은 슈미트가 남긴 안보 기조를 그대로 계승했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의 강경한 대소 정책에 협력하며 소련을 압박하는 동시에, 1985년 집권한 고르바초프의 개혁 노선과 맞물려 군축 협상의 돌파구를 열었다. 그 결과, 1987년 INF 조약이 체결돼 사거리 500~5500㎞의 지상 배치 핵미사일이 전면 폐기되는 역사적 합의가 이뤄졌다. 이로써 독일은 냉전의 핵 위협으로부터 해방되는 동시에 통일의 환경을 마련할 수 있었다. 콜은 안보를 기반으로 통일 독일의 총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과 손잡고 유럽 단일통화 도입을 추진한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설계자가 됐다. 이는 독일이 단순히 통일을 이룬 나라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중심국가로 도약하는 길을 열어줬다.
독일 통일은 결코 교류정책만의 산물이 아니었다. 서독 지도자들은 강력한 안보와 동맹 위에서 동서 화해를 추진했다. 북핵시대를 맞은 한국도 북한과의 교류와 협력이 필요하지만 성과를 내려면 균형된 핵억지력과 확고한 한미동맹 위에 서야 한다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