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8세기 이전, 해상무역의 흐름 속에서 자국 이익을 위해 스스로 문을 연 경우다. 유럽의 오래된 항구들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는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 과정에서 외부 압력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개방된 경우다. 아시아의 다수 항구도시가 이 범주에 속한다. 부산은 이 두 가지 성격의 개항을 모두 경험한, 세계적으로도 드문 도시다. 1407년과 1876년. 어느 해를 기준으로 삼든, 부산이 우리나라 최초의 개항장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876년을 기준으로 하면 2026년은 부산 개항 150주년이 되는 해다. ‘개항 150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를 논할 수 있는 항구도시는 전 세계적으로 손에 꼽힌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함부르크 마르세유 리버풀 뉴욕 보스턴 케이프타운 뭄바이와 함께 19세기 조약항·자유항·근대무역항이라는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문을 연 싱가포르 상하이 홍콩 요코하마 나가사키 부산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시대와 대륙은 다르지만, 이 도시들은 공통의 DNA를 공유한다. 특히 동아시아에서의 개항은 제국주의적 압력과 침략 속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결과 개항도시들은 세계를 향한 개방성과 혼종성을 획득했고 동시에 급격한 변화와 위기를 견뎌내는 높은 대응력을 길렀다. 그래서 개항도시는 ‘시대와 국토의 경계(edge)에서 가장 먼저 세계를 경험한 도시’로 정의된다.
부산과 비교 가능한 개항도시들이 가까이에 있다. 싱가포르 상하이 요코하마. 이들의 공통적인 DNA를 추려보면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개방성과 포용성에 기반한 창의성. 둘째,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진취적 도전정신. 셋째, 지역의 전통과 미래 사회를 집요하게 연결하려는 융합의 노력이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출발선에 섰던 이 도시들과 부산의 사이에는 분명한 격차가 존재한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물론 부산은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이라는 혹독한 시간을 겪었다. 하지만 상하이와 요코하마 역시 전쟁의 폐허를 경험했고, 싱가포르 또한 지리적·자원적으로 한계가 분명한 도시였다.
차이의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개항장으로서의 속성을 얼마나 자각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다루었나’에 있다. 부산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전후 국가 재건이라는 절박한 과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부산은 개항의 DNA를 도시 혁신과 발전의 새로운 언어로 전환하지 못했고, 결국 그것을 점차 잃고 말았다. 반면 세 도시는 공통적으로 ‘세계도시로의 도약을 위한 초집중의 시간’을 선택했다. 고질화된 관습과 제도, 그리고 익숙함이라는 안전지대를 과감히 버렸다. 항구를 단순한 물류 공간이 아니라 세계와 접속하는 실험 무대로 재정의했고, 바다로부터 밀려온 에너지로 도심을 다시 살렸다. 또 도시의 미래를 살아 약동하는 21세기의 개항장으로 설계했다. 그 결과 개항의 기억은 과거의 유산에 그치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되살아났다. 개항은 역사 교과서에 기록된 사건이 아니라, 도시 운영관리의 핵심 원리가 되었다.
부산의 개항은 충분히 해석되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항구는 기능으로만 남았고, 개항은 산업화와 개발의 서사에 가려진 채 상징과 철학을 잃었다. 개항의 DNA는 항만 철도부지 원도심 곳곳에 파편처럼 남아 있지만, 도시를 살아 약동하게 하는 정신과 정책의 언어로는 되살리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부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계와 만난 도시였음에도, 세계를 향해 구체적인 비전과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다.
2026년은 부산 개항 150주년이자 제9회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해다. 올해는 지난 일을 단순히 기념하는 해가 아니라, 도시 미래를 다시 설정할 수 있는 결정적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인구 감소, 산업 전환, 기후 위기, 초고령 사회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지금, 부산은 더 이상 산업화 시대의 성공 경험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인구가 증가하던 시절의 환상에 집착하는 오류에 빠져서도 안 된다.
이제 부산에 필요한 것은 포장된 구호가 아니다. 개항의 DNA를 현재형으로 복원하고, 이를 미래형으로 전환하는 실천이다. 세계를 향해 진정으로 열린 태도, 고착된 사회적 정서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혁신의 마인드, 그리고 개항이 품고 있는 융합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하려는 끈질긴 인내. 이것이야말로 부산이 가장 먼저 가졌으나 오래전부터 잃고 있는, 아니 스스로 방치해 온 개항도시의 본질이다. 만약 1407년의 이포개항을 부산 개항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인다면, 부산이 지닌 개항의 DNA는 단순한 근대사의 사건을 넘어선다. 그 폭과 깊이는 특정 연도나 제도에 갇히지 않고 무한히 확장된다.
부산을 다시 창의적인 바다 도시로 재구축하고, 그 도시를 세계와 재연결하는 일은 선택 가능한 과제가 아니다. 부산 재창조를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개항 150주년은 과거를 기념하는 시간이 아니라, 미래를 선택하는 결단의 시간이어야 한다. 선택을 미루는 유예는 곧 쇠퇴를 가속하는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