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브라질월드컵은 한국의 월드컵 도전사에서 최악 중 하나로 꼽힌다. 대한축구협회는 성인팀 지도 경험이 없는 홍명보를 감독으로 전격 발탁했고, 그렇게 사령탑에 오른 감독은 자기가 아는 선수를 편애하는 ‘의리 축구’ 논란을 일으켰다. 홍 감독은 1승도 못한 채 16강이 좌절된 후 “우리 선수들이 좋은 경험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인식의 문제점을 정확히 꼬집은 게 이영표다. “월드컵은 실력을 증명하는 무대이지 경험하는 무대가 아니다.”
이영표의 12년 전 일침이 이를 실현한 외국 감독의 입에서 다시 나왔다. 지난 16일 2026 북중미월드컵 조별 리그 1차전에서 강력한 우승후보 스페인과 무승부를 기록하며 대이변을 연출한 카보베르데의 페드루 브리투 감독을 통해서다. “월드컵을 경험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팀인지 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다.” 이전까지 카보베르데의 축구 실력은 물론이고 서아프리카 군도라는 사실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카보베르데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본선 진출국 확대 정책 덕분에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90분간 27번이나 쏟아진 슈팅 세례를 온몸으로 막아낸 수문장 보지냐에게 특히 많은 박수가 쏟아진다.
축구에서 예상 못한 결과가 나오면 ‘공은 둥글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대회만큼은 ‘공이 평평하다’고 말할 것 같다. 대회 초반 유럽과 남미 정통 강호들이 큰 힘을 못쓰는 사이 아시아와 중동의 약진이 두드러져서다. 한국이 체코를 가볍게 눌렀고, 일본은 축구 명가 네덜란드와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무승부를 아쉬워 한 쪽은 오히려 일본이다. 일본은 이번에 4강을 넘어 결승까지 넘본다.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도 각각 스위스 우루과이 벨기에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국과 일본은 선수 대부분이 유럽파일 정도로 큰 무대 경험이 풍부하고, 중동은 두둑한 오일머니로 최정상 플레이어를 영입해 자국 리그 수준을 향상시킨 결과다.
사실 북중미월드컵을 한국 축구팬들은 역대 어떤 대회보다 시큰둥한 분위기에서 맞았다. 유럽리그 시청이 일반화된 시대에 월드컵에 대한 기대가 이전만 같지 않은데다, 더 본질적으로는 대한축구협회와 감독에 대한 불만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고 드라마보다 더한 드라마가 펼쳐지자 축구팬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오늘 한국 축구가 멕시코전을 치른다.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감독과 선수들에게 거는 국민의 주문은 같다. 경험하지 말고 실력을 증명하라.
강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