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11일간의 여정을 마쳤다. 우리나라가 1988년 세계유산협약에 가입한 후 세계유산위원회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부산이다. 세계유산 등재와 보존·관리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기구의 연례 국제회의가 열렸다. 올해 회의가 거둔 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한국의 갯벌’의 범위와 대상이 한층 넓어진 것, 즉 한국이 보유한 세계유산 중 ‘중대한 경계 변경’이 처음 이뤄진 것은 큰 성과다. 또 세계유산 종묘의 주변 개발사업 관련 ‘세계유산영향평가’에 못을 박고, 일본 사도광산에 대한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을 적시하라는 결정문 채택도 있었다. 부산이 올해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끈 점 역시 돋보인다. 이를 계기로 부산을 비롯한 K-헤리티지의 보전과 향유 열기를 계속 이어가길 기대한다.
그래서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하 피란수도 유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에도 눈길이 간다. 지역의 대표적 기억 자산이다. 피란수도 유산은 전쟁 상황 속에서 국가 기능과 사회체계를 유지하고 국제사회의 연대 및 피란민의 신산한 삶과 생존 의지를 보여주는, 독보적인 기억 자산이다. 피란수도 유산은 임시수도 정부청사와 대통령 관저, 유엔기념공원, 부산항 제1부두, 영도다리, 아미동 비석마을과 우암동 소막마을 등 11개 유산으로 구성됐다. 피란수도 유산은 지난 2023년 5월 국내 최초로 근대유산 분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공식 등재됐다. 이어 지난해 11월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거쳐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최종 선정됐다. 당연히 지난달 부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도 피란수도 유산의 역사적 가치와 인류애·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린 바 있다. 피란수도 유산은 오는 2030년 최종 등재를 목표로 진행 중이다.
이런 가운데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부산창작오페라단이 지난 3일 영화의전당에서 창작오페라 ‘푸른 눈의 휴머니스트 위트컴 장군’의 주연과 조연, 앙상블의 공개 오디션을 진행했다. 오디션에서 뽑힌 이들이 참여한 작품은 오는 11월 14일 부산콘서트홀에서 초연된다. 이 작품은 지역의 잊혀가는 역사와 인물을 문화예술의 영역으로 호출한다는 점에서 뜻 깊다. 여기서 잠깐, ‘위트컴 장군’이 누구인가. 리차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은 유엔군 부산군수기지사령관 재직 중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당시 군법을 어기고 군수물자를 이재민에 나눠줬다. 이 일로 그는 미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갔다. 위트컴 장군은 그 청문회에서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명언을 남겼다. 위트컴 장군은 퇴역한 뒤에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전쟁 고아를 돕는 일을 하다가 1982년 7월 한국에서 숨졌다. 그는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부산 시민이 위트컴 장군을 기려 세운 공덕비 사진 속 그에 관한 ‘기억’을 재생한 것은 국제신문이다. 2012년 기획보도한 ‘부산은 무엇을 기억하는가’이다. 이어 2022년 ‘리차드 위트컴: 6·25전쟁 폐허 속에서 핀 인류애’가 출간되면서 위트컴 장군을 기리는 사업에 불이 붙었다. 결국, 시민 모금으로 2023년 11월 11일 유엔기념공원에 위트컴 장군 기념조형물이 들어섰다.
위트컴 장군과 같은 지역의 기억 자산은 왜 중요할까. 먼저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과 자부심의 뿌리가 된다. 전쟁이라는 고난의 시기를 함께 극복한 역사적 경험과 헌신적인 인물의 스토리텔링이 쌓이면 고유한 도시 브랜드와 공동체적 정체성이 형성된다. 또 위트컴 장군의 사례는 평화·희생·상생이라는 보편적 인류애의 가치를 지닌다. 이는 곧 미래 세대에 소중한 역사 교육의 자산이다. 이와 함께 기억 자산은 영화와 전시, 문화·역사 여행, 오페라와 뮤지컬 등으로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의 보고이다.
이에 따라 위트컴 장군을 다루는 창작오페라 제작·공연처럼 기억 자산을 널리 알리고 보전하려는 다양한 연계 사업이 필요하다. 기억 자산을 공연과 시각 예술을 통한 문화콘텐츠로 개발하자는 것이다. 부산창작오페라단의 공연 준비 사례에서 보이듯 지역의 인물과 역사를 극화하는 작업을 단발성으로 끝내지 않고 부산을 대표하는 레퍼토리 작품으로 정착시켰으면 한다. 하나의 원천 콘텐츠를 동화책, 웹툰, 음악극, 다큐멘터리 영화, 캐릭터 상품 등 다양한 다른 형태의 매체로 확장하는, OSMU(One Source Multi Use) 전략도 좋다. 피란수도 유산 관련 공간을 잇는 역사·문화 탐방 코스를 만드는 것 역시 괜찮다. 지역사 교육과정에 기억 자산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청소년 서포터즈 활동과 같은 참여형 프로그램을 지속해서 가동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기억 창고(아카이브) 구축과 학술·구술 기록 사업 또한 바람직하다.
오광수 편집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