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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부산진구에 있는 정문도 묘. |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산 기슭의 양지바른 곳에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로 알려진 동래 정씨 2세조 정문도 묘가 자리하고 있다. 동래 정씨는 고려시대 동래군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정회문을 시조로 한다. 정회문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동래 지역을 세거지로 삼아 가문이 번성하면서 ‘동래를 본관으로 하는 정씨’라는 명칭이 확립되었다. 안일호장은 정년 퇴임 후 받는 관직으로 일종의 명예직 호장을 뜻하는데, 정문도 또한 안일호장을 지낸 것으로 알려진다.
본래 고려시대 호장은 지방에 뿌리를 둔 강력한 토착 지배층으로 고을의 행정과 조세, 노동력 동원 등을 총괄하던 지방 향리(鄕吏·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토착 관리)의 수장을 뜻한다. 지방의 호장 집안에 불과했던 동래 정씨 가문이 정문도 묘를 쓴 이후 그의 아들 정목(동래 정씨 3세조)이 고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상서좌복야(종2품 재상)까지 오른 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조선시대에는 정승(영, 좌, 우의정) 17명, 대제학 2명, 문과 급제자 198명을 배출해 조선 3대 명문가 중 하나로 부상했다. 시조로 알려진 정회문과 1세조 정지원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단(壇)’을 두어 기리고 있다. 단이 있는 터는 주산(主山·뒷산)인 화지산에서 뻗어 내린 용맥(龍脈·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이 전진을 멈추어 안주한 곳으로 생기가 충만하다. 동래 정씨 발복(發福)의 근원지로 알려진 정문도 묘는 부산의 진산(鎭山·부산을 보호하는 주된 산)인 금정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화지산을 주산으로 한다. 대개의 묘는 후손의 발복 여부로 명당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후손발복이 증명됐음에도 정문도 묘에 대해서는 풍수 전문가들의 호불호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정문도 묘는 화지산에 뿌리를 두고 남서진한 용맥이 재차 방향을 틀어 남진한 후 현재의 터에 최종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좌청룡(좌측 산)과 내백호(안쪽 우측 산)는 거의 맞닿아 있어 수구(水口·물이 흘러 나가는 입구)를 막아 생기의 유출을 차단하고 있다. 또한 외백호(바깥쪽 우측 산)가 내백호를 감싸고 있어 수구를 한층 더 강화하고 있다. 묘를 조성하면서 심은 것으로 알려진 묘 앞쪽 좌우에 있는 수령 800여 년 된 배롱나무(천연기념물 제168호)가 좌청룡, 내백호, 외백호, 청룡안산(앞산 역할도 같이 하는 청룡)과 함께 묘 앞쪽에서 불어닥치는 세찬 바람을 막아 생기가 흩어지지 않게끔 한다. 이처럼 정문도 묘는 명당의 요건인 훌륭한 사격(砂格·주변 산의 형상과 품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땅의 모든 기운이 모여 한곳에 뭉쳐지면서 최적의 명당자리가 되는 혈(穴)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사격과 물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이를 ‘용혈위주, 사수차지(龍穴爲主, 砂水次之·명당은 용과 혈이 우선이요, 주변의 사격과 물은 다음이다)’라 한다. 혹자는 정문도 묘의 당판(堂板·혈이 맺히는 땅을 포함한 주변 면적)이 경사가 급하고 위쪽에서 내려오는 용맥의 좌우 폭보다 당판이 좁을 뿐만 아니라 지력(地力)이 약해 묘를 쓸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감정한 결과, 묘 위쪽 용맥은 경사가 상당히 급해 생기가 머물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묘가 자리한 곳은 경사가 있는 가운데 약간의 평탄함을 유지한 곳으로 ‘기룡혈(騎龍穴·달려가는 용의 등 위나 허리 부분에 생기가 응집된 혈)’에 해당한다. 그리고 묘의 중앙에 해당하는 배꼽 부위에 생기가 뭉쳐져 있는데, 이는 최상급 위치에 맺힌 혈이어서 조선 8대 명당 중에서도 상급에 속한 묘라고 할 수 있다. 정문도 묘는 주변 산의 형상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혈처(穴處·가장 핵심이 되는 명당자리)에 정확히 조성된 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