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국제칼럼] ‘탄생 100주년’ 박경리 읽기

특별판 출간 등 열띤 기념…인간성 바탕 구원과 회복

시대 초월 보편성 전하는 텍스트의 힘 여전히 유효

  • 이선정 기자 sjlee@kookje.co.kr
  •  |   입력 : 2026-08-17 18:42:29
  •  |   본지 19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올해는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이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55년 단편소설 ‘계산’으로 등단, 장편소설 ‘토지’ ‘김약국의 딸들’ 등 숱한 명작을 남긴 한국 문학사의 거장. 1996년엔 토지문화재단을 설립하고 ‘한국 현대문학의 산실’로 불린 창작실을 운영하면서 후배들에게 길을 터준, 우리 문화예술사의 넉넉한 어머니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정부는 2008년 그가 타계하자 이런 공로와 업적을 기려 문화훈장 중 최고 등급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토지’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들을 읽으며 박경리 탄생 100주년의 의미를 나름 기념해 보았다. 그가 왜 한국 문학사의 ‘뿌리’이자 생명을 품고 키워낸 기름진 ‘토지’인지 새삼 실감한 지난 넉 달이었다.

박경리의 작품은 주로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개인·가족·민족이 겪는 비극, 동시에 이를 강인한 의지로 극복하는 사람에 주목한다. 특히 초기작인 ‘표류도’나 ‘시장과 전장’ 등은 전쟁 때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역경을 견딘 작가의 자전소설 성격이 강하다. 박경리 작품의 정수이자 한국 대하소설의 금자탑으로 꼽히는 ‘토지’는 조선말부터 광복까지 최참판댁 일가를 중심으로 시대를 써 내려간다. 1897년 풍성한 한가위 명절을 시작으로 1945년 해방 소식에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끝나는데, 완독 순간 독자는 격동의 세월을 직접 버텨낸 느낌을 받을 정도로 살아 펄떡인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집필기간만 무려 25년, 권당 500페이지 안팎이 총 20권, 원고지 2만9500장이라는 방대한 서사 속에서, 작가는 600여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고난을 거쳐 끝내 삶의 영광을 찾는 그 시대 평범한 사람들을 모두 ‘주인공’으로 빛낸다.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부산과 경남이 자주 등장하다 보니 지역사를 되짚을 수 있는 점은 박경리 읽기의 또 다른 묘미다. ‘토지’에서 송관수가 관여한 형평사운동은 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 인권운동이다. ‘저울대처럼 공평하게(형평)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며 계급, 나아가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지만 일제는 물론 신분·계급의식에 찌든 대중의 ‘이중 억압’ 속에서 좌절한다. 그의 아들 영광은 이런 시대적 한계를 상징한다.

작품 속 당대 지식인 간의 격렬한 논쟁은 ‘시대 기록자’로서 문학의 역할을 보여준다. ‘아래로부터의 민중혁명’ 동학은 항일투쟁으로 이어지며 가치를 높이 평가받지만 친일로 변절하는 등 일부 일탈세력으로 인한 이면도 있음을 상기한다. 일제가 사회주의 확산 방지의 방패막이로 민족자본가를 이용하고자 물산장려운동 같은 민족자본운동을 방조했다는 시각도 조명한다. 이렇듯 박경리는 역사를 단편적 시각에 가두지 않는다. 등장인물 이름이 소설 간에 반복 사용되는 점은 꽤 흥미로운 장치다. ‘표류도’의 신문사 논설위원 이상현은 ‘토지’의 나약한 지식인 이상현으로, ‘파시’ 속 아들의 사랑을 반대하는 박 의사는 ‘토지’에서 최서희 일가의 주치의인 박 의사로 이어진다. 이런 묘하게 닮은 상호텍스트성은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구현해 가는 작품의 빌드업 과정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왜 작가는 피 흘려가며 슬픈 이야기를 써야 하는가. 왜 전쟁의 비극은 시처럼 아름다운가’(‘시장과 전장’ 초판 서문). 비극이 아름다운 건, 그것을 질긴 생명력으로 이겨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는 박경리 전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다. ‘토지’의 최서희는 악귀 같은 먼 친척 조준구에게 하동 평사리 만석꾼 땅을 모두 빼앗기고 만주로 쫓겨가지만 다시 일어서 모조리 거둬들이며 복수에 성공한다. ‘김약국의 딸들’에서 둘째 딸 김용빈은 본인과 가족의 끔찍한 비운을 겪고도 새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시장과 전장’의 지영 역시 피란 내려온 부산이라는 모든 것이 소모되는 ‘시장(市場)’과 ‘전장(戰場)’에서 내일을 기다린다.

박경리 탄생 100주년을 맞아 문화·출판계도 분주하다. ‘토지’는 천경자 화백의 회화가 표지에 실린 특별에디션이 발간됐고, ‘애가’ 등 다른 장편소설도 특별판으로 속속 출간돼 일독을 권한다. 이희건 한일교류재단은 ‘토지’ 일본어 완역팀을 지난 6월 시상했다. 고향 통영에선 문학축전이 지난 5월 시작해 오는 10월까지 계속되며, 박경리기념관도 리모델링을 거쳐 지난 4월 재개관했다. 박경리는 ‘남성 중심 문단에서 여성의 삶을 끈질기게 써내려 간 작가’로 흔히 수식되지만 젠더에 국한되지 않았다. 개인과 가족, 또는 민족의 결합된 힘으로 구원과 회복을 이루어내는 인간성 본연에 집중한다. 시대·국경을 초월하는 이런 보편성이야 말로 지금 박경리를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영상·미디어 대세 속 텍스트힙 ‘역주행’이 의아해진 시대라지만, 그의 소설은 영상보다 더한 흡입력을 자랑한다. 한 인기 영화배우의 말을 일부 빌리자면 ‘넷플릭스 왜 보나, 박경리 소설이 있는데’다.

이선정 논설위원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실속 없는 ‘국제기구 인증’ 혈세 붓는 기초단체
  2. 2‘부캉이’는 무태상어 아닌 흑상어…수과원 근접영상 분석 최종 확인(종합)
  3. 3부산 전셋집 1년새 11%↓…매물가뭄 심화에 세입자 울상
  4. 4100억대 체임 국제신문 대주주, 국감 증인 채택
  5. 5‘경영난’ 태종대 집와이어 재개장…이용료 1만 원 낮췄다
  6. 6센텀2지구 속도전…풍산 이전지 주민 경청·토지보상 착수
  7. 7[사설] 외국인 400만 시대, 부산은 이제 체류형 관광이다
  8. 8김도영 굳히기냐, 힐리어드·오스틴 뒤집기냐
  9. 9매표소 오픈런…레드카펫 ★ 보려 외국인 새벽부터 달려왔다
  10. 10부캉이 떠나도 북항 북적이려면…“원도심 접근성 개선을”
  1. 1100억대 체임 국제신문 대주주, 국감 증인 채택
  2. 2조희대 “국회·대통령의 제청 간섭은 위헌”(종합)
  3. 3송곳검증 벼르더니…교통·시설公도 싱거웠던 시의회 청문회
  4. 4[속보] 여야, 문체위 국감서 ‘암살자(들)’ 공방…국힘 “감독 나와야” vs 민주 “창작 자유 억압”
  5. 5여야, 국감서 알래스카 LNG 사업 집중 추궁
  6. 6김정호 “부산·경남 맑은 물 공급을 위해 낙동강 수질개선·취수 다변화 해야”
  7. 7‘홈플러스 사태’ MBK 김병주, 국감 불출석 “회사 경영 관여 안 해”
  8. 8[뭐라노] 조희대 “국회·대통령, 대법원장 제청 간섭 위헌”
  9. 9[2026 국감 브리핑] 백종헌 “인력 확보 없이 출발한 통합돌봄 담당자 82%가 겸직, 전담인력 ‘0명’ 시군구는 전체의 66.4%”
  10. 10강신철 “병역특례 점진적 축소, 궁극적 폐지가 국방부 목표”
  1. 1‘부캉이’는 무태상어 아닌 흑상어…수과원 근접영상 분석 최종 확인(종합)
  2. 2부산 전셋집 1년새 11%↓…매물가뭄 심화에 세입자 울상
  3. 3센텀2지구 속도전…풍산 이전지 주민 경청·토지보상 착수
  4. 4롯데백화점, 업계 첫 외국인 매출 1조 ‘포문’
  5. 5금감원 “AI 해킹 시도 IP 28개 확인”
  6. 6SMR 골든타임 놓치나…"원안위 심사기준 2032년에야 마련"
  7. 7부산 극지해양 전문강사 “현장 능력 키워요”
  8. 8부산 청년기업 ‘DPP(디지털제품여권)’ 국내 첫 상용화
  9. 9전국 건설 현장 사망자 2명 가운데 1명은 추락으로 봉변
  10. 10주가지수- 2026년 10월 6일
  1. 1실속 없는 ‘국제기구 인증’ 혈세 붓는 기초단체
  2. 2‘경영난’ 태종대 집와이어 재개장…이용료 1만 원 낮췄다
  3. 3부캉이 떠나도 북항 북적이려면…“원도심 접근성 개선을”
  4. 4부산 금정구 ‘인구감소지역’ 새로 편입…북구는 ‘인구감소관심지역’
  5. 5기장군수실 1층 이전 ‘없던 일로’
  6. 6전기車 높아진 인기에 예산 동나…부산시, 하반기 1520대 더 지원
  7. 7부산중수청장 “정치 중립성·수사 독립성 엄격히 지키겠다”
  8. 8양산시보건소 일반진료 줄인다
  9. 9전재수 시장, 소통 행보…사흘 연속 생중계 회의(종합)
  10. 10박완수 경남도지사 “행정통합 위해 부울 시장 설득”
  1. 1김도영 굳히기냐, 힐리어드·오스틴 뒤집기냐
  2. 2롯데, 6위 탈환 사활…3위 싸움 변수로
  3. 3조코비치, 올 첫 우승 눈앞
  4. 4장애인AG 결단식…“金 21개 이상 목표”
  5. 5가을은 놓쳤지만…거인 ‘레·황(레이예스·황성빈)’ 도전은 계속된다
  6. 6“감독님이 먹으라고” 정수진, 내막 폭로…유도회 “선수관리·운영체계 점검” 사과
  7. 7레이예스 200안타 달성에도…롯데, 두산에 4안타 그치며 패배
  8. 8불안한 모레노호 우즈벡전 반등할까
  9. 9‘손흥민 A매치 한국인 최다 골’ 우즈베키스탄에 2-0 완승
  10. 10아시안게임 폐막…한국 金 39개, 44년 만에 최소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원자력 청출어람, 스승을 가르치다
‘인공지능 정렬’ 골든타임 놓치지 말라
국제칼럼 [전체보기]
누구도 법 앞에 국민보다 ‘더 평등’할 수 없다
배지의 실력행사
기고 [전체보기]
전문대학을 소개합니다
상어가 떠난 뒤, 북항에 남겨야 할 것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솔직할 수 있는 용기, 당신에게도 닿기를
히말라야의 경고
도청도설 [전체보기]
통행료 면제 명암
논란의 AG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B형 간염 ‘바이러스 수치’에 ‘급여’ 맞춰야
‘공동선(Common Good)’으로서 간병 복지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지독한 집념이 세운 로컬 자산, 대한도기
사설 [전체보기]
외국인 400만 시대, 부산은 이제 체류형 관광이다
삼권분립 훼손하는 정파적 국감 안 된다
세상읽기 [전체보기]
부자(富者)가 되고 싶다면
드골 대통령과 군복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아트부산, 숫자 이후의 질문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행위별수가제와 인두제, 오해와 진실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한국이 가진 자산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 곡전재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무(武)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