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본래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공자는 일찍이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라 했다. 위정자가 스스로 바르게 서야 백성이 따르고, 그로써 정치는 사회적 갈등을 조율해 합의를 이끌어내며 공동체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견인하는 소임을 다한다는 뜻이다. 이 단순하고도 오래된 정의는 진영을 초월한 상식이자 시대를 넘어 유효한 잣대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 현장에서 이 본령을 찾기란 쉽지 않다. 뉴스를 켤 때마다 마주하는 것은 합의가 아니라 반목이요, 조율이 아니라 파행이다.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언행과 퇴행적 태도가 매일같이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넘어 상대를 적대시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보는 극단적 팬덤 정치는 과거 노사모나 박사모 시대의 진영 대립을 넘어 한층 더 격화된 양상으로 발전해 깊은 우려를 자아낸다. 삼권분립의 한 축인 대법원장을 향해 직함조차 생략한 채 폄훼성 발언을 서슴지 않는가 하면, 국회 상임위와 본회의장에서는 상대 의원을 향한 막말과 고성, 고의적 파행이 일상이 되었다. 그 사이 정작 처리를 기다리는 민생 법안은 정쟁에 밀려 뒷전으로 표류한다. 상대를 설득해야 할 자리가 상대를 조롱하는 무대로 바뀌었고, 민생과 국가의 미래를 논해야 할 의사당은 세를 과시하는 진흙탕 싸움터로 변질된 지 오래다.
정치가 이토록 대화와 타협이라는 본래 기능을 잃고 극단으로 내몰린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는 음모론과 증오를 양분 삼아 세를 늘리는 일부 유튜버와 이에 기생하는 정치권의 기괴한 생태계다. 자극적 헤드라인과 편향된 정보가 진영 간 혐오를 부추기고, 정치인들은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 같은 숏폼 콘텐츠의 조회수와 실시간 반응에 중독돼 간다. 구독자 수와 후원금이 발언의 강도에 비례해 불어나는 구조 속에서, 절제된 언어는 도태되고 자극적 언사만 살아남는다. 정책의 깊이나 장기적 비전보다 단 몇 초 만에 강렬한 자극을 주는 ‘사이다 한 줄 발언’에 매몰된 결과, 정치는 신중한 숙의의 과정이 아닌 밈(meme)과 인스턴트 말장난 생산 공장으로 전락했다. 알고리즘은 온건함이 아니라 격정에 보상을 주고, 정치인은 그 보상 구조를 빠르게 학습했다.
둘째는 당내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도입된 상향식 공천제의 부작용이다.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강성 팬덤과 극단적 지지층의 목소리가 당원 투표를 통해 공천 결과를 좌우하는 구조 속에서 정치인들은 합리적 중도층의 민심을 살피기보다 극단적 당원의 눈치를 우선 살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문자폭탄과 당원 게시판의 여론전에 노출된 온건파 의원은 배신자 프레임에 갇혀 도태되고, 소수의 강경파가 목소리를 높여 정당 전체를 인질로 잡는다.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던 제도가 도리어 소수 극단주의자의 손에 정당의 명운을 넘겨주는 역설이 완성된 셈이다.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동안 정치는 점점 더 좁은 진영의 언어로만 말한다.
이처럼 ‘정치 실종’이 가속화되는 시대를 끝내고 정치의 본령을 회복하려면 유권자와 미디어의 결단과 역할 재정립이 절실하다. 먼저 유권자는 진영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성찰적 시민의식을 발휘해야 한다. 혐오와 분열에 가두는 자극적 사이다 콘텐츠를 거부하고, 정치인을 팬덤의 대상이 아닌 국민의 엄정한 대리인으로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 극단적 언행과 막말, 팬덤 팔이로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을 표로 엄중히 심판할 수 있을 때, 정당 역시 자정 작용을 거쳐 공천 시스템과 정치 문화를 바로잡게 될 것이다.
미디어 또한 민주주의 공론장으로서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자극적 발언과 막말만을 따옴표로 중계하며 정치적 갈등을 싸움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는 보도를 과감히 지양해야 한다. 이슈의 맥락과 정책의 본질을 다각도로 짚는 탐사 보도, 양극화를 완화하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건강한 공론장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공동체의 안녕과 사회적 정의를 다지는 정치의 본령은 결국 깨어있는 유권자의 냉철한 감시와 언론의 책임 있는 보도로부터 다시 시작돼야 한다. 정치를 바로 세우는 힘은 언제나 정치 밖에서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라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