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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칼럼] 영화 ‘오디세이’ 속 ‘키르케 약’의 비밀

정승규 약사

  • 정승규 약사
  •  |   입력 : 2026-08-30 18:50:32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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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시인 호메로스는 수백 년 동안 구전으로 내려오던 트로이 전쟁과 오디세우스의 모험 이야기를 ‘일리아드’, ‘오디세이’라는 문학으로 완성했다. 고대 그리스 연합군과 에게해 건너 트로이 사이에 벌어진 10년간의 전쟁, 그리고 다시 10년에 걸친 오디세우스의 귀향이 주된 뼈대를 이룬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디세이’에는 사람을 돼지로 만드는 마녀 키르케가 나온다.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이 낯선 섬에 도착하는데, 산길에 사자 표범 호랑이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들은 키르케가 사악한 약을 먹여 길들인 맹수였다. 식량을 얻기 위해 염탐하던 선원들은 허름한 집으로 들어가고 키르케가 차려준 음식을 먹는다. 긴 항해에 몹시 굶주린 그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잠시 후 돼지로 변해버렸다. 배에 남아 있던 오디세우스는 화를 면했고, 부하들을 찾아 나선 끝에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한다.

그럼, 키르케가 먹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사람을 돼지로 만드는 약이 있었던 걸까. 영화에는 고기와 끓인 스튜가 나오지만, ‘오디세이’ 원전에는 치즈, 보릿가루, 노란 꿀, 와인이 등장한다. 마녀는 이들을 섞어 음료를 만들고 그 안에 해로운 약을 탔다. 키르케의 약은 마법처럼 보인다. 흥미를 끌기 위한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넘어갈 수 있지만, 여기에는 놀라운 약리학적 해석이 있다.

1983년 학술지 ‘Clinical Neuropharmacology(임상 신경약리학)’에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키르케가 선원들에게 먹인 약이 항콜린성 물질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독말풀 같은 식물에 들어 있는 아트로핀과 스코폴라민 같은 항콜린성 알칼로이드가 이 같은 작용을 일으킨다. 다량 섭취하면 뇌에서 신경전달물질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방해해 입이 마르고 동공이 커지며 심장이 빨리 뛴다. 심하면 정신이 혼란해지고 기억상실, 환각과 섬망까지 일으킨다. 약이 든 음식을 먹은 선원들의 이상 행동을 독초에 의한 중추신경계 중독으로 본 것이다.

영화에서는 오디세우스가 눈썰미와 기지를 발휘해 키르케의 음식을 거부하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부하들을 구출하러 가는 오디세우스 앞에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나타난다. 그는 오디세우스에게 신비로운 약초 하나를 건네준다. 뿌리는 검고 꽃은 우유처럼 희었다. 오디세우스가 몰리라고 불리는 약초를 먹자, 키르케의 약은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학술지에서 연구자들은 몰리가 갈란타민(galantamine)을 함유한 스노드롭(snowdrop) 계열의 식물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갈란타민은 아세틸콜린을 분해하는 효소를 억제해 뇌에서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증가시킨다. 따라서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차단하는 항콜린성 물질과 반대 방향으로 약효가 나타난다. 오늘날 갈란타민은 레미닐 등의 알츠하이머 치료제로 사용된다.

거기에 더해 영화에서 바다 요정 칼립소가 오디세우스에게 먹이는 꽃 모양의 로토스(lotus)도 나온다. 로토스는 달콤한 맛을 내는 열매로 오디세우스의 기억을 사라지게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잃게 만든다. 칼립소의 유혹에 넘어간 오디세우스는 7년간 섬에 머물게 된다. 이 내용은 놀란 감독이 ‘오디세이’의 서로 다른 두 에피소드를 결합한 각색이다. 원전에는 칼립소가 로토스를 건네는 대목이 없다. 오디세우스 일행이 북아프리카로 추정되는 로토스족의 땅에서 겪는 별개 이야기다.

신화 속 약은 사람을 돼지로 만들고 기억을 빼앗는 마법처럼 그려지지만, 그 기저에는 인간이 오래전부터 자연에서 얻은 약과 독의 세계가 숨어 있다. 같은 물질도 쓰기에 따라 독이 되고 약이 된다. 키르케의 독에 맞서는 몰리처럼, 약의 역사는 독의 작용을 이해하고 해독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자연에서 얻은 약초가 인간의 몸과 정신, 기억과 욕망까지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인류의 오랜 관찰과 경험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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