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만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답은 비교적 간단했다.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깊은 수심, 긴 부두와 넓은 야드, 빠른 크레인 그리고 많은 화물이었다. 그래서 세계의 항만들은 더 깊게 준설하고 더 긴 부두를 만들며 더 큰 크레인을 설치하는 경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조만간 얼마나 많은 전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깨끗하게 공급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과거 항만은 디젤 엔진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야드 트랙터와 하역장비가 기름을 태우며 움직였고 부두에 정박한 선박은 내부 엔진을 돌려 필요한 전기를 만들었다. 항만의 풍경은 현재 빠르게 바뀌고 있다. 디젤 하역장비가 전기장비로 바뀌고 자동화 터미널에서는 전기를 사용하는 무인 운송장비(AG V)와 자동화 크레인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대형 컨테이너선은 부두에 정박 중에도 조명과 냉난방, 통신장비, 각종 펌프 등을 계속 가동해야 한다. 보조 엔진을 돌려 필요한 전기를 만들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배기가스와 소음이 발생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육상전원공급설비다. 선박도 전기 자동차처럼 항만에서 거대한 플러그를 꽂는 것인데 육상에서 전기를 공급받으면 접안 중에는 보조 엔진을 끌 수 있어 대기오염과 소음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미국 LA항은 이런 변화를 가장 먼저 시작한 항만 중 하나다. 2004년 세계 최초로 컨테이너선에 육상전원을 공급하는 전용 터미널 운영을 시작했고 현재는 컨테이너와 크루즈 선석 전체에 육상전원 설비를 갖추고 있다. LA항은 나아가 항만의 전력망 자체를 확충하고 있다. 전기 하역장비와 충전시설, 육상전원 사용이 동시에 늘어나면서 기존 전력망으로는 전동화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LA시 전력당국도 항만지역의 배전망과 전력공급 능력을 확충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적인 항만이 항로 준설이나 부두 확장뿐 아니라 전력망 확충을 항만의 주요 과제로 다룬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유럽 최대 항만인 로테르담항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선박용 육상전원시설을 100개 이상 갖추고 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전력망 혼잡이 발생한다. 전기 수요 급증으로 필요한 곳에 충분한 전력을 제때 공급하기 어려운 상황이 나타나는데 항만의 전동화 속도를 전력망이 따라가지 못하는 까닭이다. 항만의 전기화는 부두에 콘센트 몇 개를 더 설치하는 문제가 아니다. 발전소에서 항만까지 전기를 가져오는 송전망과 변전시설, 터미널 내부 배전망과 충전시설을 함께 준비해야 한다.
항만을 건설할 때 도로와 철도, 방파제와 부두를 미리 설계하듯 이제는 전력망도 항만의 기본 인프라로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여기에 탈탄소화라는 또 하나의 변화가 겹친다. 국제해운이 탄소배출을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선박 연료도 중유 중심에서 LNG 메탄올 암모니아 수소 등 다양한 연료로 전환되고 있다. 앞으로 항만은 화물을 싣고 내리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선박과 물류산업에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지 허브로 변해갈 것이다. 부산항도 이러한 변화에서 예외가 아니다. 신항에는 완전 자동화 터미널이 이미 운영되고 있고 자동화와 전기 하역장비 도입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올해 국산 전기 야드 트랙터가 국내 최초로 부산항에 투입됐다. 육상전원 사용과 자동화 터미널, 전기 하역장비, 배후물류단지의 자동화가 함께 확대되면 부산항의 전력수요는 지금과 상당히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미래 항만개발에서는 10년, 20년 뒤 필요한 전력량을 미리 예측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송·변전시설을 방파제나 부두와 마찬가지로 항만의 핵심 인프라로 바라봐야 한다. 탄소 중립 시대에는 그 전기가 어디에서 생산됐는지도 중요하다. 재생에너지와 저탄소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느냐가 항만의 친환경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다. 전력의 양과 함께 전력의 색깔까지 경쟁하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이제 바다의 깊이뿐 아니라 항만으로 들어오는 전력망의 굵기도 살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