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부산항 북항 친수공원을 찾았다. 운동도 할 겸, 며칠째 부산을 떠들썩하게 한 상어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상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난간을 따라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기를 안은 부부, 반려견을 데리고 나온 시민, 삼각대를 세운 사람, 휴대전화를 든 사람들. 모두 같은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파 때문에 야간 안전사고를 막기 위한 통제 안내문까지 붙어 있었다. 잠시 뒤 누군가 말했다. “나왔다!”
수면 위로 검은 등지느러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의 휴대전화가 일제히 같은 곳을 향했다. 상어는 3분, 5분, 길게는 10분쯤 지나 다시 수면 가까이 돌며 지느러미를 드러냈다. 그때마다 탄성이 터졌다. 몇 번 이런 말도 들렸다. “관종이네, 관종.”
나도 웃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조금 이상했다. 상어가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상어는 그저 자기 방식대로 헤엄치고 있었을 뿐이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에 보여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연 앞에서도 자꾸 인간의 언어를 덧씌운다. 정작 그날 북항에서 관심을 원했던 쪽은 상어가 아니라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장면을 보며 관광과 생태를 함께 생각했다. 관광은 본래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예상하지 못한 풍경 하나, 사건 하나가 사람을 움직인다. 사람이 모이면 소비도 생긴다. 필자는 상업성 자체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어가 화제가 됐으니 캐릭터도 만들 수 있고 기념품도 나올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이 만남에서 어떤 이야기를 남길 것인가다.
상어를 오래 붙잡아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것보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제 바다로 돌아가게 할 것인지 함께 고민하는 도시. 상어 한 마리 때문에 부산 앞바다의 생태와 해양쓰레기를 다시 보고, 시민과 기업이 바다 환경에 관심을 갖는 도시. 이쯤 되면 ‘무태상어 고향 보내기 시민 모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물론 농담이다. 하지만 그 농담 속에는 붙잡아두기보다 잘 돌려보내자는 마음이 담길 수 있다.
상어를 기다리다 문득 주변을 다시 바라봤다. 넓은 친수공원과 수변 산책로, 캠핑장, 크루즈 부두가 있고 오페라하우스도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도시와 항만,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북항 친수공원은 미래가 아니었다. 잘 짜인 미래의 모습으로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다. 다만 우리가 충분히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날 찍은 사진 몇 장을 지인들에게 보냈다. 한 부산 토박이가 답했다. “색다른 경험 하셨네요. 그런데 여기가 어디예요? 부산 사람인데도 처음 보네요.”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정작 부산 사람이 사진을 보고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북항에는 아직 숙제가 남아 있다. 북항이 ‘부산에 있는 공간’에서 ‘부산 사람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 북항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더 지을 것인가만이 아니다. 무엇을 만나게 할 것인가다. 사람과 사람, 시민과 여행자, 도시와 바다, 사람과 자연이 만나는 곳. 아침에는 걷고 달리고, 낮에는 쉬고 바다를 배우며, 저녁에는 공연과 야경을 즐기는 곳. 시설은 이미 하나둘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그 사이를 사람의 경험과 관계, 이야기로 채워야 한다.
그날 아침 사람들은 3분, 5분, 때로는 10분을 기다렸다. 등지느러미가 나타날 때마다 환호했다. 그러나 상어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기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북항도 그랬는지 모른다.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는데, 우리가 이제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상어는 언젠가 떠날 것이다. 떠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다만 상어와 함께 북항을 향한 우리의 시선까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다시 북항 사진을 부산 사람에게 보냈을 때 “거기가 어디예요?”가 아니라 “아, 거기. 나도 자주 가요.”라는 답이 돌아왔으면 한다. 그때 북항은 부산이 꿈꾸는 미래가 아니라, 부산 사람이 살아가는 현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