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선을 만드는 일은 오랫동안 사람의 경험과 감각에 기대왔다. 어떤 바다에서 무엇을 잡는지, 파도와 바람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조업 공간은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 수많은 경험이 설계에 녹아들었다. 어선 한 척에도 어민과 설계사의 오랜 노하우가 담긴 셈이다. 그런데 이제 어선 설계에도 AI가 등장했다.
최근 부산 강서구 천성항에서 ‘카이브 1·2호’ 진수식이 열렸다.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교통안전공단이 AI 기반 어선설계 기술로 만든 시제선이다. 지난해 진수한 ‘카이브 3호’까지 포함하면 AI로 설계·건조한 어선 3척이 실제 바다에서 성능 검증에 들어간다.
카이브 1호는 알루미늄, 2호는 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FRP), 3호는 고밀도폴리에틸렌(HDPE)으로 재질이 각기 다르다. 그러나 이 배들의 설계 방식은 같다. AI 기반 어선설계플랫폼에 어민이 원하는 조업 방식과 선박 조건을 입력하면 최대 648개의 맞춤형 설계안을 자동으로 제시한다.
영세한 어선 설계업체가 많은 현실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경험에 의존하던 설계 방식에서 벗어나 데이터와 기술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AI가 모든 것을 대신할 수는 없다. 실제 바다에서 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조업 공간은 편리한지, 승선감이 어떤지는 컴퓨터가 아닌 어민의 손끝에서 확인된다. 이날 시제선 3척에 어업인들이 직접 올라타 꼼꼼히 살핀 이유다.
이번 진수식은 AI와 현장 경험이 만나는 첫 시험대였다. 바다에서 확보한 운항 자료와 어민들의 의견이 다시 플랫폼에 축적되면 다음 설계는 더 정교해질 수 있다. ‘설계→운항→데이터 축적→재설계’라는 선순환이 만들어지면 어선 산업의 디지털 전환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다.
해양수도를 지향하는 부산은 이런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스마트항만과 자율운항선박처럼 거대한 기술만 해양산업의 미래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바다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작은 어선 한 척의 변화 역시 해양수도가 이끌어야 한다.
AI가 어선을 설계하는 시대가 열렸지만 마지막 설계자는 여전히 바다일지 모른다. 컴퓨터가 그린 배가 파도와 바람을 만나고 어민의 손끝에서 검증될 때 하나의 어선으로 완성된다. 기술이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더 안전하게 바다로 보내는 것. ‘AI 어선’이 향해야 할 항로다.
이병욱 해양수산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