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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유의 묘. |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에 호남의 대표적인 명당으로 알려진 조유(趙瑜)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조유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동한 문신이자 옥천 조씨 순천 입향조인데, 고려 말의 혼란과 조선 건국이라는 역사적 변동기에 살았으며, 조선 건국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한 인물로 전해진다. 조선 태종이 ‘한성부 판윤(오늘날의 서울시장)’을 제수하며 등용하려 했으나 고려에 대한 절개와 의리를 지키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순천으로 내려와 정착했다.
조유 묘역 바로 아래에는 조유를 기리기 위한 문중 재실인 ‘정헌재’가 있다. 조숭문(조유의 아들)은 세종대에 무과에 급제한 후, 병마절도사(지방 군사 총사령관)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처조카인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세조 때 화를 입었으며, 이 때문에 조철산(조유의 손자) 또한 아버지 조숭문과 함께 처형되었다. 조유 집안은 조유 묘에 의해 명당의 기운을 받아 가문이 크게 번창할 수 있는 근원은 갖추었으나 사육신 사건 등과 같은 정치적 격변을 겪으며 후손들이 영광과 화를 동시에 입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가문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조유 묘는 영암 월출산, 광주 무등산과 함께 대표적인 명산으로 꼽히는 조계산의 거대한 지맥이 좌우로 요동치고 상하로 기복하면서 전진을 거듭하다가 주산(主山·뒷산)인 유치산에서 크게 솟은 후 재차 남서진을 하여 최종적으로 안주한 곳에 있다. 묘의 지형은 ‘오공형(蜈蚣形·지네형)’으로 지네 머리 부분에 정확히 묘가 있어 산세나 지형의 생김새로 터의 성격을 파악하는 ‘물형론(物形論)’으로도 혈(穴·생기의 결절점)을 정확히 잡을 수 있을 만큼 용맥(龍脈·정기가 흐르는 산줄기)의 형상이 뚜렷하다. 조유 묘를 필두로 아래에는 십여 기의 후손들 묘가 함께 있으며, 용맥이 끝난 아래쪽의 평지에는 정헌재가 있다.
정헌재는 천리를 달려온 용맥이 조유 묏자리에 혈을 맺고 나서 여기(餘氣·남아 있는 기운)가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곳 또한 좋은 기운이 흐른다. 명당의 요건을 파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승풍즉산, 계수즉지(氣乘風則散, 界水則止·기는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정지한다)’이다. 이는 거센 바람을 감싸안아 흩어지지 않게 잘 지켜내어 바람을 통해 생기를 얻고, 묘를 둥글게 감싸는 물을 통해 지기(地氣·땅 기운)를 강화하면 만복을 얻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만일 바람을 갈무리하기 위한 산이 없고, 물이 머물지 못할 정도로 수구(水口·물이 빠져나가는 출구)가 넓으면 비록 명당에 묘가 있다고 해도 복이 서서히 줄어들거나 달아나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유 묘는 명당이 되기 위한 주변 여건을 잘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유 묘는 튼실한 주산이 뒤쪽에서 묘를 향해 불어닥치는 거칠고 센바람을 순화시켜 생기가 머물도록 하며, 좌청룡(좌측 산)과 우백호(우측 산)가 서로 가까이, 그리고 겹겹이 포진하고 있어 측면에서 묘를 때리는 사악한 바람을 갈무리하고 있다. 게다가 한 폭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안산(앞산)과 층층이 펼쳐져 있는 조산(안산 뒤의 산)은 앞쪽에서 묘를 향해 부는 흉한 바람을 차단하고 있다. 좌청룡과 우백호가 넓게 벌어져 있는 묘는 마치 ‘항문이 열려있는 죽은 사람’과 같아 생기가 없게 된다. 조유 묘는 좌청룡과 우백호가 맞닿을 정도로 수구의 관쇄(關鎖·문을 잠금)가 잘 되어 있고 지맥이 뭉쳐진 곳이기에 명당의 요건을 갖추었다.
조유 묘는 고려 후기의 고승인 나옹선사가 터를 잡고, 그의 제자인 무학대사가 점혈(點穴·혈을 정확히 찾아내는 것)했을 것으로 추정할 만큼 오늘날 명당 묏자리의 대표작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