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의 가전제품을 쓰는 소비자는 제품의 장점과 불편을 누구보다 잘 안다. 기업은 소비자를 제품 기획과 개발에 참여시키고 소비자의 평가를 반영해 완성도를 높인다. 우리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에는 기술과 투자뿐만 아니라 소비자와 함께 제품을 개선해 온 노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처럼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소비자를 ‘프로슈머(Prosumer)’라고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결합한 말이다. 이 원리를 정책에 적용하면 어떨까. 공공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이 정책 수립에 직접 참여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할 때 ‘정책 프로슈머’가 되는 것이다.
우리 행정은 관 주도의 하향식 정책 결정을 보완하고자 시민과 전문가의 참여를 확대해 왔다. 협치는 행정과 민간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며, 거버넌스는 여러 주체가 정책을 논의하고 실행하는 구조다. 정책 프로슈머는 그 안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실행 결과를 평가해 개선으로 연결하는 상향식 정책 참여 방식이다. 필자는 해양수산부 재직 시절 부산항 북항재개발사업을 추진하며 그 가능성을 경험했다. 2017년 출범한 ‘부산항 북항통합개발추진협의회’에는 지역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 각계 인사가 참여했다. 민간이 위원장을 맡고 해양수산부와 부산시가 간사를 맡아 민간이 논의를 주도하고 행정이 정책 반영을 뒷받침했다.
협의회라는 참여 체계가 거버넌스라면, 민간과 행정이 함께 논의한 과정은 협치였다. 시민과 전문가가 사업 기획에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해 정책에 반영되도록 한 것은 정책 프로슈머의 역할이었다. 당시 중요한 쟁점은 사업성과 공공성의 관계였다. 협의회는 5부두 일대의 매립 논의에서 사업성 확보보다 수역 보존과 친수공간 확보를 우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근대문화유산인 북항 제1부두와 곡물 저장시설인 사일로, 항만 크레인 등 산업유산도 보존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필자는 내부 검토를 거쳐 이를 정책에 적극 반영했다. 시민과 전문가의 의견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진 뜻깊은 경험이었다.
정책 프로슈머의 참여가 시민에게 법적 권한과 책임을 모두 넘긴다는 뜻은 아니다. 최종 결정의 책임은 행정에 있다. 시민이 의견을 제시하면 행정은 반영 여부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시민도 실행 결과를 평가하고 보완에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순환이 정책의 품질을 높인다. 아쉬운 점은 참여 구조의 지속성이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담당자나 기관의 추진 방향이 바뀔 때 시민 참여도 약해진다면 축적된 논의와 신뢰를 이어가기 어렵다. 시민 참여가 특정인의 의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시민의 경험과 지혜를 지속적으로 반영하도록 참여 구조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지금 북항에는 정책 프로슈머의 역할이 더욱 절실하다. 친수공원 이용객 증가에 따른 교통·주차 불편 해소, 상업·편의시설 확충, 수상·시설물 안전관리 강화, 해양관광 콘텐츠 확대를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하고 신속히 실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협의회의 취지를 되살려 시민의 현장 경험과 의견이 정책의 기획과 실행, 평가와 개선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열린 행정은 북항이 글로벌 해양관광 거점으로 도약할 기반이 될 것이다.
최근 부산항미래정책연구원은 서부산을 해양수도권의 경제 중심지로 육성하기 위한 ‘4대 특화거점 전략’을 시에 건의했다. 공항·항만·철도를 연결하는‘ 트라이포트’를 기반으로 강서·북·사상·사하구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구상이다. 이를 실현하려면 민관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시민과 전문가가 기획부터 실행과 평가까지 참여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정책의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소비자의 참여가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듯 국민의 참여는 정책 품질을 높이고 시행착오를 줄인다. 북항에서 경험한 시민 참여의 가능성을 지속가능한 제도로 정착시키고 해양수산 분야를 넘어 행정 전반으로 넓혀 가야 한다. 국민의 경험과 지혜가 정책의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도록, 이제 정책 프로슈머 시대를 꽃피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