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꽃핀 자리에서 폭력은 사라진다. 이것이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 ‘낮과 밤은 서로에게’(감독 김종관)의 핵심이다. 지난 6일 시작해 15일 끝난 제31회 BIFF 현장을 취재하며 이 영화를 개막작 기자시사회에서 한 번, 개막식에서 또 한 번 이렇게 두 번 보았다. 이 작품에는 폭력이 한 점 한 톨 안 나온다. 출연진은 모두 대화하느라 바쁘다. 평화를 바라는가? 대화해 보라! 이것이 김종관 감독의 의도이며 작품세계다.
영화제 상영관의 큰 스크린이 주는 충만함을 만끽하며 배우 심은경 한선화 등, 이 작품 출연진이 펼치는 멋진 수다 속으로 들어서면서 영화라는 예술 장르와 더 친해지는 느낌, 배우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글에서는 현장에서 느낀 제31회 BIFF의 여러 순간을 곱씹어 보고 나름대로 의미를 캐내 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영화제야말로 개막작이 펼쳐 보인 ‘대화가 꽃피는 자리’임을 절감했다.
지난 6일 밤 개막식 무대에서는 장이머우 허안화 양자경 판빙빙 등 중화권 거물급 영화인이 서로 인사하고 찬사를 보내며 격려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 순간, BIFF의 품이 한결 넓어 보였다.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자 양자경이 마이크를 잡았다. 1962년 말레이시아 태생으로 1980년대부터 홍콩 영화계 최고 여성 액션 스타로 등장한 뒤 2023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아시아 여성 최초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을 받기까지 도전과 좌절과 영광의 대장정을 이어온 그가 말했다.
“혼자서는 못 합니다(No one does this alone).” 객석에서 이 말을 듣는 순간 감전됐다. 유튜브에서 본 로버트 드 니로, 댄젤 워싱턴, 조앤 롤링 등 큰 성취를 이룬 예술가의 연설 영상에서 빠지지 않는 낱말이 바로 ‘협력’과 ‘동료’다. 부디 자만에 빠지지 말라. 그러다 망한다. 너 혼자 해낸 게 아니다. 타인을 인정하고 협업하라. 영화라는 장르가 오늘의 젊은이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이 메시지를 양자경은 ‘No one does this alone’으로 표현했다. 거장 양자경이 더 좋아졌다.
부산 중구 남포동 원도심을 중심으로 열리는 BIFF의 관객 주도·시민 참여형 프로그램인 커뮤니티비프(커비)도 내심 주목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배우 김아중, 감독 변영주 등등 다채로운 초대 손님이 대거 참여하는 기발하고 흥미로운 행사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다. 이런 행사를 꾸준히 마련하는 저력이 어디서 오는지도 궁금했다. 그러다가 강말금 배우를 만나 이야기를 들은 건 행운이었다 .
커비는 지난 10일 밤 ‘고박필름나이트’ 파티를 열었다. 인기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에 나온, 가상의 영화사인 고박필름에서 착안한 자리였다. 이 작품을 쓴 박해영 작가와 여러 출연 배우를 초청했고, BIFF를 찾은 다양한 영화인이 함께했다. ‘모자무싸’에서 고박필름 대표로 나와 깊은 인상을 준 강말금 배우를 여기서 만났다. 그에게서는 겸손함과 고향 부산에 대한 애정을 강렬히 느꼈다.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97학번인 강말금 배우는 “요즘 부산에 자주 못 오지만, 부산에서 태어나 스물여덟 살에 (연극을 하려고) 상경했으니 오롯이 부산 사람이다. 원도심의 경남여고를 나와 그런지 중구 원도심 쪽으로 오면 기분이 참 좋다”고 했다. 그는 길고 어려웠던 시절을 거쳐 2020년 개봉한 김초희 감독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찬실이 역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대화하는 내내 겸손하고 친절했던 그의 몸가짐은 자연스럽게 이 배우를 응원하는 마음이 더 강해지게 했다.
세계 영화인이 비슷한 고민을 공유한다는 느낌도 받았다. 독일의 한 영화제 관계자는 “한 번도 극장에 안 갔는데, 안 본 영화는 한 편도 없는 관객이 많아지는 현실이 너무 걱정스럽다”며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건 중요하다”고 항변했다.
이야기는 흘러 흘러 지난 15일 폐막식에 가 닿는다. 폐막식에서 가장 빛난 사람은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이었다. 13편이 겨룬 올해 BIFF 경쟁 부문에서 마지디 감독이 만든 ‘빵과 책(Midday Meal)’은 최고상을 받았다. 이 영화의 힘과 에너지는 굉장했다. 피폐하고 가난한 이란의 마을에서 펼쳐진 인간다움과 선의를 둘러싼 이야기, 엄청난 에너지와 관련해 심사위원장 장이머우 감독은 “우리 심사위원 7인은 만장일치였다”고 발표했다.
마지디 감독이 무대에 올랐다. 그는 현재 전쟁 등으로 엄청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란 국민에게 고마움과 위로를 전했다.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겁니까? 그저 독립된 삶을 원할 뿐입니다. 이란 사람들은 굴복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이 영화가 어머니라는 기적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다“고 말하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조봉권 문화체육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