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에는 토지가 생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전경제학이 토지·자본·노동을 생산의 3요소로 정의한 이유다. 자본주의가 완숙기에 접어든 현대 경제학에선 토지 대신 총요소생산성(TFP)에 더 주목한다. 기술·경영 혁신과 정부의 규제·제도 개혁이 생산성을 높이는 성장 동력이기 때문이다. TFP는 노동·자본과 함께 잠재성장률을 산출하는 3대 지표 중 하나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추락하던 국내 잠재성장률의 상승을 전망했다. 2023년 2.06%에서 2024년 1.94%로 내렸다가 올해(2.14%)와 내년(2.20%) 반등한다는 것이다.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률과 달리 잠재성장률은 물가 불안 없이 지속 가능한 성장 수준을 보여 주는 만큼 경제 체력 회복의 신호다. 잠재성장률이 2년 연속 우상향한 시기가 ‘3저 호황’이던 1986∼1987년이 마지막이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소식이다.
IMF는 반도체 특수와 AI 도입에 따른 생산성 향상을 잠재성장률의 촉매로 꼽았다. 저출생·고령화로 노동 공급이 정체되더라도 반도체 설비 투자 증가(자본)와 AI 보급이 생산성을 높인다는 의미다. AI를 생산의 네 번째 요소로 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부의 고민은 반도체 호황으로 거시지표가 개선되어도 그 혜택을 소수 기업이 독점하는 데 있다. 국내 취업자 2900만 명 중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협력사 임직원 100만 명을 뺀 나머지는 호황의 과실을 누리지 못한다. ‘AI 디바이드(격차)’가 커질수록 양극화 경고음은 한층 요란해진다.
전통 제조업이 밀집한 동남권에선 한숨 소리가 더 크다. 부산 비정규직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이미 13.7시간으로 줄었다. 초단시간 노동자 비율도 2015년 3.2%에서 지난해 7.6%(전국 6.2%)로 급증했다. 한계에 내몰린 영세기업들이 주휴수당과 보험료·퇴직금을 아끼려 주당 14시간 미만 ‘쪼개기 고용’에 나서면서다. 반도체 특수의 빛이 중소기업·자영업자에게 퍼지지 않으면 AI 시대가 오히려 노동의 종말을 재촉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어제 아제이 방가 세계은행그룹(WBG) 총재를 만나 AI 발전에 따른 부작용을 논의했다. “(세계가) AI의 혜택만이 아니라 격차 해소를 위해 공조하자”고 제안했다. 문제의식은 맞다. 이제 해법을 찾아 실행할 때다. ‘13.7시간’이 노동시장의 미래로 고착되면 최근 프랑스를 점령한 ‘불평등 항의’ 시위가 우리를 겨눌 수 있다. 성장과 생산성 향상은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정부 정책이 중요한 때다.
이노성 미래전략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