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특별한 역할을 해 온 해항(海港)이다. 개항 이후 세계와 만나는 관문이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운동의 공간이었다. 한국전쟁기에는 피란수도로 국가의 존립을 사수하고,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에서는 시민이 독재와 권위주의에 맞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끌었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독재에 맞선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나는 마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학교는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휴교했다. 선생님은 시내에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던 나는 그 말을 뒤로하고 거리로 나갔다. 해가 저물 무렵 시내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도로를 점거하고 ‘유신 철폐’ ‘민주 회복’ ‘학생 석방’을 외쳤다. 각목을 하얀 천으로 감아 대오를 정비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시위대가 상가를 지나며 불을 끄라고 강하게 요구했고, 파출소가 불타는 장면도 목격했다. 학생의 눈에 그 모든 광경은 낯설고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구호를 들으면서 왜 사람들이 저렇게 나섰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은 다음 날의 모습이었다. 간밤에 불탔던 파출소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리되고 페인트칠까지 말끔하게 돼 있었다. 격렬했던 거리의 흔적은 그렇게 빨리 지워졌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당시 체포된 친구들 가운데 몇몇이 훗날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내가 거리에서 봤던 장면의 의미도 새롭게 다가왔다. 부마항쟁은 이제 역사책에 남겨질 지나간 역사로만 볼 게 아니다. 그날의 거리와 구호, 불타던 파출소 모습은 기억을 통해 내 삶에 남아 있는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시민의 힘을 보여줬다. 그러나 독재체제가 무너졌다고 민주주의가 곧바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신군부의 집권과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은 시민의 저항만으로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없음을 보여줬다. 따라서 항쟁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기억하고, 이름 없이 참여한 시민의 경험까지 발굴해 그 역사를 시민 모두의 공동 자산으로 계승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계층 간 불평등과 지역·세대·젠더 갈등을 여전히 겪고 있다. 일자리와 주거, 교육과 복지의 격차, 기회의 불균등과 차별이 그 바탕에 있다. 그런데 해결책을 찾기보다 상대 진영을 비난하며 갈등을 키우는 모습도 나타난다. 일부 언론과 정치 유튜브는 복잡한 사회문제를 진영 대결로 단순화하고, 정치권은 시민 삶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 경쟁보다 지지층 결집과 상대 진영 공격에 몰두한다. 시민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언론의 주장에는 관대하면서 상대의 잘못만 비판한다면 민주주의의 자율적 판단과 문제 해결 능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시민의 집단행동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수단이다. 4·19혁명과 부마항쟁, 6월 민주항쟁과 촛불집회는 시민의 저항과 연대가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힘임을 보여줬다. 2024년 12월 비상계엄 사태 역시 헌정질서와 시민의 자유가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일깨웠다. 그러나 위기 때마다 시민이 거리로 나서 권력을 저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권력이 헌법의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국회와 사법부의 견제 기능을 보장하며, 정치적 갈등을 제도 안에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뉴스와 정치적 주장의 출처·근거를 확인하고, 사실(fact)과 해석을 구분하며,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도 같은 기준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진영의 승패보다 정책이 시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야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시민이 만나 주거 일자리 교육 복지 문제를 논의하고, 정책과 예산을 살피며 공공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일도 필요하다. 부마항쟁의 역사교육 역시 현장 답사와 구술 기록, 시민 강좌와 토론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오늘의 민주주의 문제와 더 연결해야 한다.
부마민주항쟁의 의미는 과거의 희생과 공적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역사를 오늘의 민주주의를 돌아보는 거울로 삼는 데 있다. 부마항쟁 47주년의 주요 과제는 시민을 진영의 추종자에서 민주주의의 주체로 되돌리는 것이다. 진영을 위해 분노하는 시민이 아니라 사실을 판단하고 권력을 감시하며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민, 위기 때만 거리로 나서는 시민이 아니라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시민이 필요하다. 그날 거리에서 봤던 시민의 저항이 오늘날에도 의미를 가지려면, 그 기억은 과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의 힘과 제도적 통제, 사회적 연대가 함께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 부마항쟁의 기억을 오늘의 민주주의 실천으로 이어가는 것이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