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중략)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가서 그들과 함께 나도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김남주 시인의 ‘이 가을에 나는’ 시(詩) 일부입니다.
시인이 압송차를 타고 이송되다 창살 틈 사이로 바라본 들판은 낯익은 풍경이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매일 밭을 일구던 바로 그 들판이었지요. 그 길을 바라보며 간절히 소망한 건 거창한 꿈이 아니라 햇살 아래 고추 따는 어머니 곁에서 함께 일하고, 손목 오라를 풀고 발목 시리도록 들길을 걷는 일 같은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였지요.
3000여년 전의 호메로스 대서사시 ‘오디세이’ 역시 전쟁이 끝나고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으로의 복귀’를 그리고 있습니다. 고향 이타카로 가는 길은 일주일 정도면 갈 수 있는 간단한 길인데, 참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거센 파도와 풍랑, 강적과 같은 외부 고난만이 아니라, 불멸을 선물하려는 미모의 여신과 세이렌의 뿌리칠 수 없는 유혹도 넘어야 할 고개였습니다. 전쟁 중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힘없는 이들을 겁탈하고 건물을 파괴하며 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일은 매일 찾아오는 악몽으로, 자신이 지은 죄로 고통받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습니다.
소소하게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즐겁게 배우고 성장해 집으로 돌아오는 일, 설레는 마음으로 수학여행에서 친구들과 함께 뒹굴며 더 성숙해져 오는 일, 다양한 축제에 참여해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날리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일, 낯선 여행지에서 다른 문화와 방식으로 제각기 살아가는 세상을 보며 이해의 폭을 넓히며 돌아오는 일 등 지극히 자연스러운 우리 일상을 다시 들여다 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일상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간절함, 기도, 풀지 못한 숙제, 가눌 수 없는 슬픔이기도 합니다. 일상이 깨져 잠 못 이루는 이들을 만난다면, 그들의 간절한 이야기에 가만가만 귀 기울여주고 따뜻하게 손잡아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게 해주는 일, 살아남은 이들이 해야 할 마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그들이지만 내일은 내가 될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니까요.
가던 길 멈춰 등 뒤로 내리쬐는 늦가을의 햇살과 바람을 온전히 느껴보세요. 적념(寂念)을 안겨주는 노을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길에서 만나는 들풀과 인사를 나누는 일, 문득 생각나는 사람과 따뜻한 밥 한 끼 나누는 일도 좋겠지요. 작은 것들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시인이, 오디세이가, 그리운 이들을 먼저 떠나보낸 이들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은 일상이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눈부신 삶의 순간을 놓치지 마세요.
문득 소중한 일상의 초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입니다. 찌는 듯한 더위, 걷잡을 수 없는 곳곳의 산불 홍수 태풍 등 지구가 심하게 몸부림치며 앓는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이지요. 기후 위기, 생태 대전환 같은 말들이 먼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 눈앞에 닥친 일임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돌보지 않고 살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서야 뒤늦은 후회와 두려움 앞에 서게 된 것이지요. 많이 사고 짧게 쓰고 쉽게 버리는 일상, 인간 중심으로 곳곳을 파헤치고 개발한 대가를 받는다 생각하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해집니다.
우리를 원망하기보다 고운 빛깔로, 맛난 열매로 주고 또 주는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할까 생각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나무가 고마워서 황폐한 니카라과 땅에 100만 그루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이지수 박사처럼 살기는 어려워도, 거리에서 만나는 나무들에게 “미안해” “고마워” 인사를 건네는 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일, 일상의 회복을 돕고 함께 하는 일은 바로 실천할 수 있겠지요.
“인간은 어머니 지구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지구는 인간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전 대통령의 말을 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