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는 이른바 '거대담론'이라는 것을 추방해버렸다. 그 이전까지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한국사회의 사회구성체의 성격과 같은 추상화된 논의가 다방에서 술집에 이르기까지, 앳된 대학생부터 노년의 학자에 이르기까지 열띠게 이어졌다.
거대담론을 논하는 것이 꼭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거대담론이란 필연적으로 추상화를 동반하며, 삶의 모순적이면서도 미세한 국면을 단순화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거대담론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도 없다.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단기적인 이해관계로 괴로워하지만, 크게는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거시적인 전망이 없으면 또한 절망하는 존재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그러하지만, 국가적 차원이나 문명의 차원에서도 유사하게 작동하는 감정의 구조인 것이다. 특히 현재와 같이 지구적인 자본주의 자체가 구조 변동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거나, 문명 자체가 지속 불가능한 생태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상황,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 자체가 붕괴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양되고 있는 시점에서는, 큰 틀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거대담론'이 요청되는 것이다.
최근 일군의 사회과학자들이 이른바 '한국사회 체제논쟁'을 벌이면서,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시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나선 것은 그런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녹색평론'이 일찍부터 제기해 온 생태문명론이나 최근 '문화과학'에서 60호를 기념하여 다시 '즐거운 혁명'을 이야기하는 등의 시도는 그간 한국의 지식인사회에서 실종되었던 거대담론의 복원이 이 문명사적 전환기에 다시금 요청된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사적 전환기라 말했는데, 그렇다면 오늘의 문명의 성격을 묻는 일도 빠질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일본의 사상가 모리오카 마사히로의 '무통문명'이란 개념은 오늘의 한국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커다란 시사점을 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괴로움과 아픔이 없는 문명이 인류의 이상이었는데, 이런 이상에 근접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의 무통문명이라고 말한다.
물론 오늘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괴로움과 고통이 더 넘쳐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실제로 그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문제는 각각의 개인들이 그러한 괴로움과 고통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데 골몰하고 있고, 기술유토피아주의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고통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모리오카의 주장이다.
오늘날 인간들은 적절한 수준에서 욕망을 관리당하고 있으며,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문명의 시스템에 자발적으로 속박당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인간은 먹을 것과 안정·쾌락을 공급해주는 사회시스템과 자발적인 속박관계를 맺으려는 듯 보이는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자기가축화'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무통문명의 작동원칙으로 일컫는 다섯 가지 기제는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처세술이다. (1)쾌락을 찾고 고통을 피한다. (2)현상유지와 안정을 추구한다. (3)틈새가 보이면 욕망을 확대 증식한다. (4)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5)인생·생명·자연을 관리한다와 같은 원칙들은 사실 우리들의 일상에 이미 미만해 있는 태도인 것이다.
오늘의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미디어는 물론 삶의 현장에서 증폭되고 있는 사회적 고통의 실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용산참사와 비정규직 문제와 민주주의의 몰락과 4대 강 개발이 자연에 가할 재앙적 미래와 언론자유의 붕괴와 교육의 종말 등의 문제를 생각하며, 이대로 세상이 굴러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행동'을 끌어내지는 않는다. 철학자 지젝은 '냉소적 주체'라는 개념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나도 그게 문제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어쩌라구?" 이런 냉소적 주체들이야말로 모리오카 식으로 말하면 가축화된 존재들이다. 이런 가축화된 존재들은 자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타인의 고통마저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식인(食人)사회를 용인한다. 타인을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안심하는 사회, 그게 지금 한국사회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