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9일은 100년 전 대한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날이다. 강제병합 100년을 의식하면서 몇 년 전부터 한일 양국에서는 불행했던 과거를 극복하고 화해협력의 미래지향적인 앞날을 맞을 수 있도록 고민하는 분들이 늘어가고 있다. 걸핏 하면 한국에 대한 망언으로 빈축을 샀던 일본 각료들도 최근 바뀐 민주당 정권 때문인지,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는 흔적들을 내비치고 있다. 그 예로 센고쿠 요시토 관방장관이나 오카다 가쓰야 외상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그 내용이 어떤 수준이 될지는 모르지만 총리 명의로 '한국에 사죄한다는 방침'을 발표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을 들 수 있다.
일본 정부의 이 같은 자세와 함께 최근 양국의 지식인들이 양국의 문제를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난 5월 10일 서울과 도쿄에서는 양국의 지식인들이 같은 날 '한국 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7월 28일에는 도쿄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한일 지식인들이 '한일강제병합 원천무효 인정'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이 공동성명의 설명회를 가졌다. 서명작업을 주도했던 와다 하루키 도쿄대 교수는 성명 발표 당시 200여 명 정도였던 서명자가 1118명으로 늘어났다고 밝히면서 일본 정부에 "성명서 전달과 함께 8월 29일에 성명 내용을 반영한 총리 담화를 발표해주도록 요청할 것"이라고 했다.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에 주목하는 것은 발표 시기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이 지금까지 논의된 어떤 것과도 달리 학자적 양심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4500여 자로 된 공동성명은 양국의 역사학자들이 '한국 병합'을 두고 "일본 정부의 장기적인 침략 정책, 일본군의 거듭된 점령 행위, 명성황후 시해와 국왕과 정부요인에 대한 협박,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항거를 짓누르면서 실현한 결과"임을 밝혔다고 주장하고, 1875년 강화도 사건에서부터 1910년 8월 29일의 '한국 병합'에 이른 과정을 설명했다. 공동성명은 또 한국 병합이 "대한제국의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격렬한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한, 문자 그대로 제국주의 행위이며, 불의부정한 행위였다"는 것과 "조약의 전문도 거짓이고 본문도 거짓이다. 조약 체결의 절차와 형식에도 중대한 결점과 결함을 보이고 있다"면서 '한국 병합'에 이른 과정이 불의부당하듯이 병합 조약도 불의부당하다고 지적했다. 공동성명은 일본 극우세력에게 미칠 파장을 고려하여 '불의부당하다'는 윤리적 표현을 썼지만 내심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불법'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동성명의 핵심은 병합조약의 처리문제에 있다. 이 문제와 관련 1965년 6월 22일에 조인된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고 했다. 그러나 양국은 'already null and void'의 효력 발생시점에 대한 해석을 달리했다. 일본정부는 1948년 대한민국 성립으로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했고, 한국정부는 당초부터 불법 무효였다고 해석했다. 이런 해석 차이에 대해 공동성명은 "양국의 해석문제를 두고 병합의 역사에 관하여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과 왜곡 없는 인식에 입각하여 뒤돌아보면 이미 일본 측의 해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병합조약 등은 원래 불의부당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초부터 null and void였다고 하는 한국 측의 해석이 공통된 견해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고 결론짓고 "이런 공통의 역사인식 위에서 한일 역사문제를 공동의 노력으로 풀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성명은 또 1990년대 이후의 무라야마 총리 담화 등이 한국 측 해석을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미 열었다고 보고 있다.
양국 지식인들이 제기한 '병합조약' 처리문제는 한일관계 해결의 핵심이자 총체적 성격을 띄고 있다. '병합조약'의 원천무효화를 선언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일본 국민의 용기 있는 결단은 감동을 불러일으켜 한일 간의 역사적 과제들을 큰 틀에서 풀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고 나아가 동북아의 새 질서 창조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일본은 이 호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