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자락에 단풍이 곱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 단풍은 이내 지리산을 지나 한라산 자락까지 한달음에 내달릴 기세다. 백두대간을 따라 그렇게 단풍이 남하하듯 우리 정치도 선거의 단풍으로 물들고 있다. 서울시장 선거의 바람은 이제 막 불기 시작한 북풍을 타고 부산 동구청장 선거에까지 불어 닥칠 것이고, 재보선 이후 이어질 총선과 대선은 그 선거 단풍의 절정을 연출할 것이다.
단풍철이면 늘 삼삼오오 떼 지어 전국의 명산을 찾듯 한국정치의 단풍나무 주변에도 떼 지어 선거꾼들이 꼬여들고 있다.
그들 속에 군계일학으로 빛나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미래권력을 점지해 놓았다는 선거의 여왕 박근혜다. 반은 등 떠밀려 나선 것이겠지만 유독 선거철만 되면 천금같이 무겁던 그의 입에서 재갈이 풀린다. 나무늘보처럼 더디기만 했던 예의 그 신중한 행보는 마치 절지동물의 발이 부산스레 움직이듯 빠르기 그지없다. 매일 대중의 눈과 귀를 매료시킬 뉴스거리를 찾아 헤매는 매스컴은 그녀의 입과 걸음에 온통 신경을 집중한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가 되어 그녀의 지원유세에 목을 매고, 저잣거리의 사람들은 그를 상대할 장수를 상아탑에서 끌어 내지 못해 연신 안달이다. 마치 잠시 멈춰 섰던 활동사진이 다시 돌아가듯 선거철만 되면 정치의 세계는 그를 중심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대체 선거가 무엇이건대 왜 그에게 그토록 엄청난 양의 엔돌핀이 솟게 하고 또 사람들은 왜 그토록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그와 조우할 기회라도 닿는다면 한 번쯤은 농 삼아서라도 묻고 싶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구현장치로써 인민들의 자유의지를 표출하고 수렴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과거 18세기 서구의 귀족사회가 그랬듯 상층 귀족들 간에 제비뽑기나 순번제로 관직이나 권력을 배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쓴다 하더라도 대의제의 역사가 보여주듯 여전히 가장 효율적인 대의정치의 방법은 투표선거임엔 틀림없다. 그럼에도 과연 그 방법이 민주주의를 완벽히 구현해주는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다. '사회계약론'의 저자인 루소는 "시민은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 시에만 자유로울 뿐 의원이 선출되자마자 노예화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선거를 통해 정치인에게 위임된 권력은 나누거나 양도할 수 없기에 선거는 루소가 말하듯 사기극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대의정치에서의 선거가 지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아직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지 못했다. 싫든 좋든 울며 겨자 먹기로 투표선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의정치의 편의를 위해 투표선거에 의존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따른다. 선거과정 뿐만 아니라 선거결과에 따라 배분되는 권력이 효율적인 경쟁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정적 지지와 권력기반이 확보된 후보자가 인민의 지지와 요구에 제대로 눈길을 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엘리트 간의 경쟁에서의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이 민주주의의 요체라는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선거의 여왕과 조우할 기회가 달리 없을 것 같기에 그에게 농 삼아 물었던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고자 한다. 박근혜는 선거철만 되면 엔돌핀이 솟는다. 왜냐하면 그는 오로지 우리 사회의 지배구조와 지배세력의 이익의 향배가 불안해지는 선거철만 다가오면 예의 자기보호본능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거에서 승리하고 나면 - 루소의 표현대로라면 그의 선거구민이 다시 노예가 되었을 때 - 다시 경쟁 없는 독점 권력의 보호 속에 겨울잠을 자야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을 기득권의 보호 아래 공주의 삶을 살아 왔기에 지나친 정치적 경쟁으로 인해 그를 보호해온 정치적 기득권이 흔들리는 불편한 상황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 기득권이 조금이라도 흔들릴 조짐이 보일 때면 선거의 여왕으로 우리들 곁으로 돌아오곤 했던 것이다 .
그가 '안철수 신드롬'으로 찾아온 '정치의 위기'에 왜 그토록 발끈하며 신발 끈을 동여매게 되었는지, 또 왜 불원천리를 무릅쓰고 부산 동구청장재선거까지 지원에 나섰는지 조금은 이해될 법도 하다. 그가 '안철수 신드롬'으로부터 지켜내려는 그 '정치'가 무엇인지 사뭇 궁금할 따름이다.
동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