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의 원조가 반계 유형원이라면 1681년생인 성호 이익은 중시조쯤 된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당쟁의 본질은 ‘밥그릇 싸움’이라면서 예를 들어 설명한다. 밥 한 그릇을 놓고 여러 명이 둘러앉아 먹으면 왜 말투가 그러냐, 왜 팔을 치느냐, 시선이 곱지 않다는 등 여러 이유로 반드시 다투게 되지만 실제 원인은 밥이 모자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은 시험의 나라였다. 1800년 정조는 순조의 세자 책봉을 축하하는 의미로 특별과거 시험을 이틀간 치른다. 여기에 응시한 사람은 21만5000여 명이었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나라에서 녹을 주는 관직의 수는 고작 3000을 넘지 않았다. 이 엄청난 불균형은 필연코 죽기살기식 당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밀어내지 않으면 자신과 자식의 자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과거 합격을 위해 당연히 온갖 비리와 꼼수가 동원되었다. 시험과목인 ‘사서오경’의 족보집과 기출문제집이 나돌았고 대리시험도 예사였다. 1800년, 21만 명이 넘게 응시한 시험에서 제출된 답안지는 7만여 장이었다. 하지만 채점은 믿기 어렵겠지만 겨우 반나절 만에 끝났다. 응시장에는 입장했지만, 답안지는 내지 않은 나머지 14만 명의 역할은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묘사에 따르면 과거장에서의 좋은 자리 잡기와 대필, 커닝, 대리시험 등이었다. 참으로 익숙한 풍경이지 않은가?
2022년 사교육비는 26조 원으로 역대 최대였다. 학생 수는 계속 줄어들었는데도 1인당 지출이 많이 늘어난 것이다. 올 1/4분기에도 3.2%가 또 올라 역대 기록을 경신했다. 사교육비 물가상승률은 10년 만의 최고 기록이었다. 이것이 수능 킬러 문항과 사교육 카르텔 때문일까? 원인과 결과를 뒤바꾸지 않고 명료하게 본질을 지적하는 ‘성호사설’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렇다. 사교육비 증가는 수능 난이도 때문이 아니라 ‘밥그릇 싸움’ 때문이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시장은 그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금융위기 이후에는 한 번 비정규직이면 영원한 비정규직의 가능성이 커졌다. 한국 노동시장에서는 첫차를 놓치면 다음 버스는 오지 않는다. 2003년 32.6%였던 비정규직 비율은 2021년에는 38.4%, 2022년에는 37.5%로 높아졌다. OECD 기준을 적용해도 전체 임금 노동자 중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28.3%(2021년 기준)로 OECD 평균 11.8%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 일본 15%, 독일 11.4%, 영국 5.6%에 불과하다. 정규직이 되어도 고용 안정성은 대단히 낮다. OECD 통계에 따르면 나라별 평균 근속연수는 프랑스 10.8년, 독일 10.9년, 이탈리아 13년이지만 한국은 고작 5.8년이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5월 공부도, 취업도, 취업을 위한 직업훈련도 하지 않고 그냥 쉬는 청년들이 지난해보다 10% 늘어난 35만7000명에 이른다. 2021년 기준으로는 OECD국가 가운데 3번째로 높다. 학문적 용어로는 ‘일자리 미스매치’라고 부르는데 쉽게 말하면 눈높이를 낮춰 중소제조업으로 가봐야 돈도 안 되고 평생 골병들고 개고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대기업 노동자 평균소득은 월 563만 원인데 비해 중소기업은 절반도 안 되는 266만 원에 불과하다. 산재라도 당하면 더 큰 일이다. 2018년 12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사고로 숨진 김용균의 산재보상금은 1억3000만 원이었다. 곽상도 전 의원의 아들은 기침 이명 어지럼증으로 쓰러진 적이 있다는 이유로 회사로부터 2021년 산재 보상금 44억7000만 원을 받았다. 이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치자. 그렇다 해도 대기업·정규직 12%에의 진입 여부는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한 한국에서는 ‘아빠 찬스 없는’ 보통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취업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이 될 수도 없고 자녀에게 중산층이 될 기회나 가능성을 제공할 수도 없다. 이 게임의 키 포인트가 수능이다. 구해근의 ‘특권 중산층’에 따르면 이른바 ‘번듯한 일자리’에 취업한 졸업생의 대부분은 10개 상위권 대학 출신이었다고 한다. ‘교육과정 내 수능 출제’는 모든 정부의 다짐이었다. 교육부 담당국장이 면직되고 교육평가원장이 옷을 벗었지만 6월 모의고사에서 킬러 문항이 많았다고 지적된 국어 과목 만점자는 지난해보다 4배나 많았다. 자율형사립고와 특목고는 그대로 두면서 사교육비를 때려잡는 것이 가능할까? 노동시장의 개편 없이, 임금 격차에 대한 고민 없이, 계층사다리에 대한 고민 없이 수능 시험에서 오직 킬러 문항만 출제하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 달을 보려는 사람에게 손가락만 보라고 하고 있다.
4차산업혁명이 요구하는 것은 지식 암기력과 오지선다형 문제 풀이 요령이 아닌 융합과 창조력을 갖춘 인재이다. 당연히 ‘과목융합형’ 문제와 ‘국어 비문학’ 문제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외국의 유사 시험들도 그렇다. 2022년 9월, 교과 과정에서 벗어난 킬러 문항 출제를 금지하는 법안이 민주당 발의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그때 교육부 차관은 ‘이미 (수능 출제 범위는) 공교육 과정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법안 발의까지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답변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