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한국 근대 의료의 발상지인 줄 아는 사람은 뜻밖에 적다. 국내 최초 서양식 병원으로 인정받는 제생의원(1877년) 개원지가 부산 중구다. 제중원(광혜원)보다 8년 앞선다. 제중원은 조선이 세운 반면 제생의원은 일본이 만들었다는 게 차이점이다. 하지만 이 병원은 지석영 선생이 70여일간 머물며 종두법을 배우고 순종이 직접 방문해 치하했을 정도로 전국적 유명세를 탔다. 제생의원 전통은 두 갈래로 이어진다. 한쪽은 제생의원 후신 부산부립병원을 계승한 부산의료원, 다른쪽은 제생의원의 토지와 건물을 물려받은 부산대병원이다. 부산의료원과 부산대병원 둘 다 제생의원을 모태로 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의료기관인 셈이다.

부산이 한국 의료계에서 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분야는 또 있다. 건강보험이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가 1968년 만든 부산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그것이다. 가입비 100원과 월회비 60원만 내면 누구나 무료로 진료받는 획기적인 제도였다. 전국민 의료보험이 시작되기 무려 21년 전이다. 장 박사는 6·25 전쟁 당시 유엔군 야전병원 외과의사로 근무하다 부산으로 남하해 천막병원을 차렸다. 이것이 지방 최초 암센터로 유명한 고신대 복음병원(고신의료원)이다. 인제대 의대는 아프리카에서 봉사정신을 실천하다 타계한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 모교다.

부산의 의대들이 다시 한번 주목받기 시작했다. 정부가 의대 정원을 2000명 확대하면서다. 증원분의 82%(1639명)는 비수도권에 배정했다. 부산대 고신대 동아대 인제대 등 4개대 의대 정원은 157명 늘어난 500명이 됐다. 정원의 60% 이상은 지역인재전형이어서 학생과 학부모 기대치를 한껏 높이고 있다. 학원가엔 벌써부터 문의가 줄을 잇고, 의대 주변 부동산도 들썩인다고 한다. 의대 지방유학 시대가 열릴 조짐이다.

의사라는 직업이 성공과 출세를 보장한 지는 꽤 오래 됐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의대를 졸업하고도 전공의 신분으로 박봉과 살인적인 노동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이제 정원 확대는 기정사실로 굳어졌고 의대로 들어가는 문은 다소 넓어졌다. 성곽에 이미 진입한 자는 자신들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를 걷어 차기 바쁘고, 누군가는 낮아진 장벽에 매달려 들어가려고 발버둥치는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정부든 의사든 진정으로 국민 입장에서 의료의 질을 고민한다면, 부산에 뚜렷한 인적 물적 발자취를 한번쯤 더듬어 볼 일이다.

강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