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동백아가씨가 활짝 피었다. 꼭 60년 전 대중가요로 활짝 피었던 ‘동백아가씨’가 이번엔 부산근현대역사관의 기획전시실에서 특별전으로 만개했다. 1964년 백영호 선생이 작곡하고 이미자 가수가 불렀던 동백아가씨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불후의 명곡이었다. 그런데 60년이 지난 지금, 노래 한 곡이 특별전시가 되었다니 어떻게 가능했을까? ‘동백꽃잎에 새겨진 사연’이라는 가사처럼 동백아가씨의 개화에는 많은 사연이 있었다. 사연은 곧 스토리텔링을 위한 ‘원천 소스’이다. 유물에 새겨진 사연을 하나씩 찾아보니 거대한 이야기의 자원을 만났고, 그것은 족히 기획전시실을 채울 만한 전시 스토리텔링이 되었다.

나는 전시 기획 과정에서 백 선생의 유족께서 기증하신 유품 외에도 여러 차례 백영호기념관을 방문해 선생이 남긴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작곡가 백 선생에게 한 가지 칭호를 더 붙이기로 했다. 바로, 음악 기록물을 철저히 보관하고 전승했던 ‘아키비스트(archivist)’이다.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작곡가와 가수 등을 접촉해 보면 실제로 악보 한 장, 음반 한 장 남기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백 선생은 2만5000여 점에 달하는 엄청난 육필 악보와 가사지 등 중요한 음악 기록물을 고스란히 남겼다. 나는 기껏 하나쯤으로 생각하던 동백 아가씨 악보가 150여 점이나 되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꼼꼼한 아키비스트는 동백아가씨 원본으로 추정되는 악보 외에도 곡조가 달라지는 악보, 가수에 따른 편곡 악보 등까지 모조리 남겼다.

꽃망울이 오른 동백아가씨가 봉오리를 완전히 열기까지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었다. 대개 동백아가씨를 일반적인 가요로 알고 있지만 이 노래는 영화 주제가였다. 영화 주제가 동백아가씨를 처음 요청한 사람도 영화를 제작한 김기 감독이었다. 그런데 영화였던 동백아가씨는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동아방송의 라디오 연속극이었다.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던 추식이 만든 라디오 연속극 동백아가씨는 밤늦게 방송되는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라디오 연속극이 히트하자 영화로 제작되었고, 영화를 장식하는 주제가로 동백아가씨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원 소스 멀티 유즈’이다. 하나의 소재로 소설 영화 가요 드라마 등 여러 매체로 파급이 가능하다는 스토리텔링 전략을 오래전 동백아가씨가 방증해 준 셈이다.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1963년 서울로 올라간 백 선생의 타향살이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활동의 토대였던 미도파 레코드는 두 회사로 쪼개졌고, 마땅한 히트곡이 나오지 않아 낙향까지 고민했다. 김 감독으로부터 영화 주제가 작곡 의뢰를 받고 백 선생은 이미 만들어진 ‘황포돛대’를 주었으나 거절당했다.

이때 동백아가씨 탄생에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작사가 한산도였다. 한산도는 백 선생이 히트시킨 노래의 대부분을 작사한 콤비였다. 그는 대중적 감수성이 뛰어나면서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언어의 마술사와 같았다. 그렇다고 한산도가 동백 아가씨의 가사를 단번에 써 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이번 특별전에는 동백아가씨 가사의 수정과정을 보여주는 가사지 3점이 전시되어 있다. 노래의 제목도 달라지고, 2절이 1절로 바뀌는 등 산고의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작곡가 백영호’(백경권 저) 평전에서는 백 선생이 한산도의 최종 가사를 보고 이틀 만에 작곡을 했다고 했다. 먼저 완성된 가사를 보고 그에 맞춰 리듬과 박자를 떠올리는 것이 백 선생의 작곡 스타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사와 작곡이 되었다고 해서 노래가 완결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노래의 발표는 가수의 몫이다. 동백아가씨의 화려한 등장에는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힘이 있었다. 이미자 없는 동백아가씨는 상상조차 어렵다. 영화사 측에서 당초 동백아가씨의 가수로 이미자가 아닌 다른 가수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백 선생이 동백아가씨의 가수로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이미자를 발탁했다. 당시 그녀가 임신 8개월의 만삭이었으니 염려의 눈빛을 보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노래를 취입하는 과정에서 키를 낮추고 곡조의 변화가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호흡이 가쁜 와중에도 무사히 노래를 잘 소화해 음반 제작을 마쳤으니 이때가 비로소 대중가요사의 새로운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발표 이후 동백아가씨 음반은 수십만 장이 팔려나갔다. 선배 작곡가 박시춘은 “나는 홈런타자이지만 당신은 동백아가씨 하나로 만루 홈런을 친 거야”라고 했다. 하지만 한 노래가 히트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동백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20년이란 각고의 세월을 흘려 보내야 했다. 오늘도 동백꽃으로 붉게 물든 기획전시실을 서성이다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어본다. “부산의 동백아가씨 또 없습니까?” 대중의 정서를 사로잡고, 시대를 뒤흔들 2020년대 판 새로운 동백아가씨의 출현을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