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부산시가 비밀 문건으로 공개를 거부하던 퐁피두 센터와의 양해각서가 세상에 드러났다. 지난 10월 14일 부산시 국감 당시, 이소영 의원의 손에 이 문건이 들려지면서 문건 공개를 거부해온 박형준 시장의 화들짝 놀란 얼굴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러나 이 문건의 내용은 모두 ‘기밀’이었기에 내용을 알고 있는 이들조차 밝히길 꺼려했다.

부산시와 조르주 퐁피두 국립 예술문화센터 간의 양해각서의 내용을 이 짧은 지면에서 다 논할 순 없다. 필자는 문제가 되는 몇 조항을 시민과 공유하고자 한다. 우선 제2조 ‘사업설명’에는 아주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퐁피두 센터 부산을 퐁피두 측이 5년 동안 점유한다는 것이다.

점유권은 물건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를 부여하는 법적 지위다. 한마디로 부산 분관은 퐁피두의 소유란 의미다. 퐁피두 측은 자신들이 수립한 세부 계획에 의거, 부산시에 모든 비용과 책임을 지게 하되 점유권은 자신들이 가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5조 ‘재무조건’에는 상설전, 기획전, 교육비와 로열티를 합치면 연간 120억 원이 지출되고, 여기에 세금, 운반비, 보험료 등 모든 비용은 부산시가 부담하며 퐁피두 측은 한 푼도 나누어 내지 않는 것으로 협약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제6조의 ‘기밀유지’ 협약을 들여다보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제3자 또는 대중에게는 그 어떤 정보도 공개하지 않겠다고 되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제9조 ‘언어와 준거법’에서 양측의 기밀문서를 프랑스어와 영어로만 작성하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양해각서에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와 프랑스어다. 가히 충격적이다. 국가 차원에서 보면 한국과 프랑스의 양해각서이기에 기본적으로 각서는 두 나라 언어로 작성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왜 영어와 프랑스어로 작성하도록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박 시장이 늘 주장하는 부산시가 영어 상용도시를 지향하기에 퐁피두는 프랑스어로, 부산시는 영어로 작성하기로 한 것인가? 어떻게 국제관계의 협약문건에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협의가 되는가? 참으로 궁금하다.

자국의 언어로 문건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국의 문화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화의 뿌리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주권의 포기를 넘어 나라의 주권을 포기하는 바와 같다. 그리고 한국어 문건이 없기에 훗날 문제가 생겼을 경우 영문본을 우선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입장을 제대로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자체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고 남의 나라에 속국이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굴욕적인 협약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것이 지자체의 수장이 독단적으로 맺을 수 있는 협약인가? 그 비정상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주종적인 협약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조항이 있다는 사실이다. “본 양해각서는 프랑스법에 따른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맺어야 하는 협약에서 한국법이 아닌 프랑스법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필자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앞서 확인한 협약 내용들에서도 나타났듯이 부산시는 일방적인 퐁피두의 입장에 따르기만 한 부끄러운 주종관계의 협약임을 다시한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서명란도 의문이다. 협약서에서의 당사자들 서명은 동등하게 나란히 서명할 수 있도록 서식을 만드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이 협약서 문건에는 서명자의 위치가 상하로 나뉘어져 있다. 이게 프랑스 협약문서의 일반적인 서명양식이라고 한다면 부산시는 퐁피두의 하부기관으로 서명을 하는 꼴이 된다.

이 지면에서 다 밝히지 못한 양해각서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다보면 우리가 부산시민인지 프랑스 속국인지 혼란스러워지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다. 양해각서가 지닌 더 세세한 문제점은 이 지면에서 일일이 다 밝힐 수 없기에 관심있는 독자들은 필자가 ‘대학지성’에 발표한 글을 참조하시길 권해드리고 싶다. 이제 부산시는 주종관계에 준하는 이런 비밀협약을 어떻게 퐁피두 측과 맺게 되었는지를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퐁피두 분관 유치를 중단해야 한다. 이것이 시민을 위한 정의로운 문화행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