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2월이 되면 새삼스레 내 나이를 헤아려 보게 된다. 특히 이십대 후반에는 한 해가 가는 것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었다. 남들에게 내보일 번듯한 명함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서른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삼십대 중반에 접어들자 조금은 무덤덤하게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올해 또다시 불안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년에 39살이 되기 때문이다.
부산시 청년기본조례에 명시된 청년 연령 범위는 만 18세에서 39세까지다. 나에게는 이제 ‘청년’으로 불릴 수 있는 시간이 단 1년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부산문화재단의 청년예술가 창작활동지원사업, LH 청년전세임대 등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사업을 통해 홀로서기를 할 수 있게 된 나로서는, 그간 누려온 수혜에 대한 감사함 만큼이나 아쉬움도 크게 느껴졌다. 그동안 받아왔으니 이제는 그 혜택이 더 어린 친구들에게 돌아가야 할 차례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더 욕심이 났다.
지원 사업의 ‘막차’에 탑승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공공기관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던 중, 엄마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리고 이 전화 한 통으로 나는 ‘39세’라는 나이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엄마가 전한 소식은 이랬다. 막내 이모가 갑작스럽게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조혈모세포 이식 가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엄마가 검사를 받게 되었다는 것. 제주도에 사는 엄마는 경기도에 사는 이모를 위해 즉시 비행기에 올라탔고, 현재는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자녀보다 형제자매가 조직적합항원(HLA)이 일치할 확률이 더 높다는 건 나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환자와 기증자 간 항원이 일치할 확률은 부모와는 5% 이내, 형제자매간에는 25% 이내라고 한다. 외가는 다섯 자매가 있지만, 신체 나이를 고려할 때 막내 이모를 위해 공여자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엄마가 유일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도 같이 검사를 받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절차가 내 생각과는 달랐다. 형제자매간에 100% 일치자를 찾지 못하면 그 다음은 타인 100% 일치자를 찾는 것이 순서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배우 최강희가 TV 프로그램에서 조혈모세포 기증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얼핏 본 기억이 났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채널을 돌렸는데, 막상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되고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엄마의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나도 조혈모세포 기증희망자로 등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검색을 하다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건복지부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 따르면, 조혈모세포 기증희망자 등록은 만 39세까지만 신청이 가능하다. 내가 올라타야 할 진정한 ‘막차’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방법도 간단했다. 가까운 헌혈의 집을 방문해 등록신청서를 작성하고 혈액 5㎖를 채혈하면 끝. 이후에 조직적합항원(HLA) 검사 결과가 장기조직혈액통합관리시스템에 등록되고, 등록된 정보와 환자의 HLA형이 일치한다면 최종 의사 확인을 거쳐 기증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일단 등록을 해놓고 나면 만 55세까지 기증할 수 있다.
내가 조혈모세포 기증희망자로 등록한다고 해서 내가 우리 이모의 공여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삐 감귤 따던 일손을 내려놓고 두말없이 비행기에 올라탔을 엄마의 심정처럼, 당신이 아직 언니들보다 젊어 다행이라며 씩씩하게 웃던 엄마의 모습처럼, 나 역시 이만 분의 일이라는 기적을 통과해 누군가를 살리는 일에 적극 동참하고 싶다.
내세울 명함 하나 없다며 초조해하던 스물아홉의 나에게, 남들이 누리는 혜택을 더는 누리지 못하게 될까봐 전전긍긍 욕심을 부리던 바로 어제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도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서른아홉. 네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새해 아침이면 별 의지 없이 중얼대던 목표 같은 것들이 있다. 올해에는 운동을 하자. 술은 좀 줄여야지. 그것들이 이제는 절실해졌다. 건강해지자. 기적 같은 확률로 기회가 찾아올 때 두말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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