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벽두였던 1월 초 ‘순자(荀子)’를 올해 첫 책으로 집어 든 건 우연이었다. 오래전 선물 받았지만 읽지 못하고 꽂아두었던 ‘순자’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인문학자 몇 분에게서 순자(서기전 323?~서기전 238?)가 실은 아주 중요한 중국 고대 제자백가 사상가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읽을 기회를 못 만들었다. 동양 고전 강좌나 책이 공자 맹자 노자 장자는 많았는데, 다른 사상가는 무척 적은 현실과도 관련이 있지 싶다.
▷고대 중국 철학·사상을 집성한 대단한 학자 ▷그 과정에서 자사 맹자 노자 묵자 혜시 등 유명한 철학자도 냉철하게 비판한 논객 ▷당대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법가의 대가 한비자(韓非子)와 이사(李斯)를 가르친 스승 ▷“임금은 배요, 서민은 물이다. 물은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어엎기도 한다”는 문장을 저서 ‘순자’에 넣어 긍정한 고대의 사상가 ▷성악설 등이 순자에 관해 내가 알던 적은 지식이었다.
낮에는 짬이 잘 안 나 집에 가서 밤에 읽어야 했던 ‘순자’에서 만난 사상가 순자는 사유가 엄정·치밀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인 사상가여서 현대성을 느낄 지경이었다. 서릿발 같은 기상도 있다. 물론 약 2300년 전 인물이므로 그 세월 격차는 고려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시작한 비상계엄 사태는 국회의 탄핵 소추안 의결·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으로 이어졌고, 25일 헌법재판소에서 최종 변론이 있을 예정이다. 비상계엄 기도 그 자체는 국회의 해제 의결로 다행히 즉각 좌절됐지만, 아직 관련 상황이 이어지고 있으므로 내가 ‘순자’를 읽던 모든 밤은 여전히 탄핵 공방의 밤이었고 계엄의 밤이었다.
“임금이란 여럿이 모여 잘 살도록 해주는 사람이다.” “임금이 일반 습속이나 관습을 따르며 백성을 너그러이 사랑할 줄만 알아도 임금자리는 유지된다.”(이상 ‘올바른 정치제도·왕제(王制)’ 편) “임금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을 잘 돌보는 것을 말한다.”(‘임금의 도리·군도(君道)’ 편) 순자가 2300여 년 전 사람이니 ‘임금’ 등 옛 표현을 현대 감각으로 바꿔 받아들이는 데 유의하며 문장의 맛을 보았다. 대가답게 간결·단순하다. 이들 문장을 만나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순자’를 통해 비춰보고 돌아볼 수 있겠다는 판단이 왔다.
순자는 말했다. “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우는 소리를 내면 나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한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천지의 변화이자 음양의 변화로 드물게 생기는 일이다. 그것을 괴상하게 여기는 것은 괜찮지만,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이다.”(‘하늘에 대하여 논함·천론(天論)’ 편) 이어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오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는 온다”는 논의도 전개했다.
2300여 년 전 사람이 차분하고 냉철하게 편 논리에서 과학과 이성이 제구실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계엄과 탄핵 정국에서 유난히 무속 이야기가 많았다. 손바닥의 왕(王)자도 포함된다. 순자의 말을 참고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한 대목 더 짚어본다. “대체로 사람들이 귀신이 있다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의 정신이 멍할 때와 의심으로 혼란스러울 때에 그렇게 생각을 정해버리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습기 때문에 병이 나면 냉증에 걸리는 것인데, 그 냉증이 귀신 때문이라 생각하고 북을 두드리며 돼지를 삶아 놓고 푸닥거리를 하지만, 틀림없이 북만 헤어지고 돼지만 낭비하게 될 뿐 병이 낫는 복을 누리지는 못한다.”(‘가려진 마음은 열어야 한다·해폐(解蔽)’ 편)
다음 문장도 곱씹게 된다. “하늘은 사람들이 추위를 싫어한다 하여 겨울을 없애지 않는다. 땅은 사람들이 먼 것을 싫어한다 하여 넓음을 없애지 않는다.” 정치가 자기 마음대로 안 풀린다고 정치 자체를 없애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면 큰일 난다. 비상계엄은 헌법을 해치고 정치를 없애려 한 시도다.
‘순자’는 두꺼운 책이다. 내가 읽은 을유문화사판(김학주 옮김)은 한글 번역문, 한문 원문, 각주 등을 합쳐 1000쪽이 넘는다. 거기서 현재 한국 정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대목, 판단에 도움을 주는 문장을 꽤 만났다. 하지만 지면 한계 등으로 여기에 충분히 펼쳐놓기는 어렵다. 다만, 왜 굳이 ‘순자’를 들고 와 장황한 글을 썼는지는 밝혀두고 싶다.
지난 12월 3일 이후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이 펼쳐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힘들었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새롭게 짜인 미디어 환경은 걱정스럽기도 했다. 인류가 긴 세월 축적한 민주주의·공동체·자유·인문 가치는 힘이 빠지는 걸까 하는 걱정도 했다. 그래서 내친김에 고전 속으로 다시 한번 들어가 보고자 했다. 그때 ‘순자’를 만났다. 만나고 보니, 놀랍다. 마음이 좀 놓인다.
조봉권 문화라이프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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