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중반 어느 땐가부터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며칠씩 건너뛴 적은 있어도 나름대로 꾸준히 써왔지만. 돌이켜보니 거의 20년 동안 일기를 쓰지 않은 셈이다. 그렇게 중단된 첫째 원인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게을렀던 탓이고, 그 외 두어 가지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IMF 후유증 때문이었다. IMF 시기 광고기획사를 운영하다 쫄딱 망한 아픔이 있다. 그런 와중에도 일기는 계속 썼는데, 일기의 내용이 온통 나쁜 상황 또는 괴로운 심정만 반복적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일기가 우울증을 가중하는 작용을 했달까.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고파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전업 글쓰기로 행로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하면 오히려 일기를 매일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아심도 들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정도 있다. 글쓰기를 전업으로 삼으면 거의 매일 어떤 단상이나 정보 등 소위 잡문을 끼적이기 마련이거든.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적지 않고 날짜 기록을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일기의 형식만 갖추지 않았을 뿐 잡다한 상념이나 보고 들은 정보를 긁적이다 보니 일기를 굳이 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다 지난 겨울 동안 고려 중기의 관료이자 대문호였던 이규보의 작품집 ‘겨레고전문학선집’을 읽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우리에게 ‘동국이상국집’ 지은이로 널리 알려진 이규보는 평생 8000수 이상의 시를 썼다. 시작(詩作) 부문만으로 살필 때 그렇지, 사실 이규보는 일기 형식의 잡문도 많이 썼다. 그 스스로 밝혔는데 그 많은 시를 짓는 바탕이 하루하루를 기록한 일기였다고. 일기가 곧 시작의 모티프 또는 정보 역할을 했다는 뜻인즉.

그로부터 자극받아 다시,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곤 일기장에 이름부터 지어 붙이기로 했다. 일기장에 이름을 지어 붙이기로 한 이유는 이렇다. 예전의 일기 내용을 보면 대개가 잘못된 일 또는 씁쓸한 생각 등 부정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기의 역할이 일상을 기록해 반성한다는 점이라고 보면, 젊었을 때는 올바르지 못했던 일상을 바로 잡거나 새로운 생각을 추동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한데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부정적인 생각이나 달갑지 않은 일을 매일매일 적으며 인생을 산다면, 일기를 쓰는 것이 되레 삶에 굴레를 씌우는 꼴 아닐쏜가. 하여 스스로 즐기는 일상을 중심으로 쓰자는 생각에서 즐길 오(娛)자를 택하긴 했는데 ‘자오(自娛)’로 짓자니 너무 뻔했다. 이규보가 허름한 자기네 집을 ‘자오당(自娛堂)’이라 했던 데다, 조선 후기 문신이었던 한익상의 호가 같은 한자로 쓴 ‘자오’였기 때문이다.

청백리였던 한익상은 강원도 관찰사로 선정을 베풀어 이름 높았고, 이규보는 국보라 할 만큼 걸출한 문인이었기에 그들의 호를 따서 일기장 명칭을 ‘자오’로 써도 꽤 의미가 있겠으나,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옛적의 관료였기에 그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지금의 내 나이에 비추어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낀 바를 일기장에 쓰는 까닭을 고려해서 ‘성오일기(醒娛日記)’라 이름 지었다. ‘성오’를 풀이하면 깨달아서 즐겁거나 즐기는 삶에서 깨닫는다는 의미다. 사실대로 털어놓자면 젊었을 땐 번잡한 생각이나 아집에 사로잡혀 좌충우돌하는 삶만 살았지 스스로 즐기는 생활을 하지 못했음은 물론, 깨달음에 대한 즐거움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노상 앞만 보고 달리는 삶 또는 성공을 추구하며 그에 몰두하는 삶을 사느라 그런 깨달음을 얻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원천을 따지자면 게으름에 연유한 바겠지만.

이제부터는 소소한 것일지라도 깨달으면 그게 인생의 즐거움이고, 이런 것들을 하루하루 적는 자체가 즐거움이 되도록 하자는 마음에서 한자로 ‘성오일기’를 노트 표지에 썼다. 그게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는 행동 철학이기도 할 테니 날마다 보면서 마음 깊이 새길 수 있도록.